“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 머무르고,
그에게는 걸림돌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는 어둠 속에 살아가면서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성탄절은 요한의 편지를 계속 읽습니다.
그것은 요한의 편지가 사랑의 서간이기 때문이고,
사랑으로 오신 주님을 우리가 이제
보게 되었고,
알게 되었고,
사랑하게 되었음을 줄기차게 얘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편지와 복음의 또 하나의 주제는 <빛이신 하느님>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이신 하느님이 빛이시고,
그저 빛이 아니라 우리의 빛이시라고 요한은 얘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랑이신 하느님이 빛이시다>는 것과
<사랑이신 하느님이 우리의 빛이시다>는 것은 같으면서도 다릅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고 빛이시라는 것은 자명하고 누구도 부인치 않지만
이 자명自明한 것이 문제입니다.
자명하다는 것은 누구에 의해 밝혀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밝히 드러나는 것이라는 얘긴데
비록 자명하고 누구도 부인치 않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고,
특히 나와의 관계에서 내가 그것에 관심이 없다면
쳐다보지 않는 중천의 달과 같을 뿐입니다.
밝은 달, 아름다운 달이 하늘, 그것도 중천에 떠 있어도
쳐다보지 않으면 나의 달, 우리의 달이 아닙니다.
중천의 달이 자명하지만 그 밝음이 나의 어둠을 밝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빛이심이 자명하고 그 걸 내가 부인치 않지만
하느님의 사랑이 나의 빛이 되지 못함,
바꿔 말하면 하느님의 사랑을 나의 빛으로 삼지 않음,
이것이 거들떠보지 않는 무관심의 어둠이라면
또 다른 어둠, 곧 미움이라는 어둠도 있습니다.
무관심의 어둠이 중천의 달도 쳐다보지 않는 어둠이라면
미움의 어둠은 달과 나 사이에 구름이 낀 어둠입니다.
하느님의 선을 나의 것으로 소유하려는 욕심이 선을 악으로 만들어버리듯
하느님의 빛을 나의 빛으로 소유하려는 욕심이 빛을 악으로 만드는 겁니다.
그러니까 미움이란 욕심이라는 구름에 가린 어두운 사랑이고,
어둠이란 욕심이라는 구름에 사랑이 가린 빛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나(만)의 것으로 소유하려는 욕심,
하느님의 사랑과 같은 사랑을 인간에게 바라는 그 욕심,
이것이 사랑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미움으로 바꾸고,
이 미움이 사랑의 빛 가운데 거닐지 않고 어둠속을 거닐게 합니다.
사랑하면서도 미워하게 하는 사랑욕심을 오늘도 경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