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합니다.”
그제는 저희 수도회 부제, 사제 서품식이 있었습니다.
서품식의 끝 무렵 새 부제와 사제들이 신자들에게 돌아서서
인사를 드릴 때 제가 옆 형제에게 참 다들 잘생겼다고 얘기하니
옆에 있던 다른 형제가 그렇게 얘기하면 나이 먹었다는 표시라는 겁니다.
그러고 보니 저의 눈이 전과 확연히 달라졌습니다.
제가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아니 지금보다 옛날에 더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특히 제가 가르치던 형제들은 저의 전부를 걸 정도로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시선이 매우 차가웠고
지금은 그때보다 제 시선이 훨씬 따듯해졌습니다.
지금의 형제들이 그때 형제보다 더 훌륭하다고 할 수 없고
어찌 보면 그때 형제들이 지금 형제들보다 너 나을 수도 있는데
어찌 저의 시선이 그때는 차갑고 지금은 이렇게 따듯해졌을까요?
여기서 저는 프란치스코가 어느 봉사자에게 보낸 편지를 인용하고픕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면
그들에게서 다른 것을 바라지 마십시오.
그들이 더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이었으면 하고 바라지 마십시오.”
지금도 제가 수련자들을 가르치며 자주 걸려 넘어지지만
옛날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자주 걸려 넘어졌습니다.
훌륭한 프란치스칸이기를 바라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그때나 지금이나 형제를 사랑하기에 그가 훌륭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시선이 차갑고 어떤 때는 따듯한 이유는
내 마음에 들기를 바랄 때는 시선이 차갑고
그렇지 않을 때는 시선이 따듯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사랑, 형제사랑에 자주 실패하는 이유는
형제를 하느님의 너로 사랑치 않고 나의 너로 사랑하고
너와 내가 하느님 없이 너와 나로만 대면하기 때문입니다.
기실 너와 나로 진실하게 대면할 수만 있어도 대단한 사랑이긴 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너와 나로 진실하게 대면하지도 않고,
하느님 없이 너와 나만으로 대면할 수도 없습니다.
너와 내가 진실하게 대면하기 위해서는
너와 내가 하느님 안에서 만나야 하고,
그저 너인 너와 그저 나인 내가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인 너와 하느님인 내가 만나야 합니다.
이 말이 너무 지나치다면
내가 하느님인 듯 네가 하느님인 듯 만나야 합니다.
어제 아침 이를 닦고 있는데 수련 형제 하나가 허락을 청하러 왔습니다.
그래서 생각 없이 칫솔은 손에 든 채
제 방문을 열고 형제의 청이 무엇인지 얘기를 들었습니다.
발가락에 동상이 걸린 지 3주가 되었는데 아직도 안 낫는다는 것인데
아무리 수도원이 춥다한들 동상에 걸렸다는 것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되어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문간에 세워둔 채 꼬치꼬치 물었습니다.
그리고 어쨌건 치료를 받으라고 하고 돌아서는 순간
제 잘못이 선연히 드러나면서 저는 제 가슴을 쳤습니다.
어찌 형제를 이를 닦으면서 만나고,
방안으로 들어오라고 해서 따듯하게 얘기를 듣지 않고
문간에 세워두고 사무적으로 얘기를 들었으니 말입니다.
이 형제의 어머니라면 이렇게 했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제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고 그런 적이 수두룩했습니다.
영의 눈으로 형제를 하느님으로 보라고 수없이 말하고 가르쳤건만
정작 저는 형제를 그렇게 소홀히 대하였던 것입니다.
부끄러워하며 반성하는 아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