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그의 이름은 ‘정의의 임금’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또한 살렘의 임금, 곧 평화의 임금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으며, 족보도 없고,
육적인 혈통과 관련된 율법 규정이 아니라,
불멸하는 생명의 힘에 따라 사제가 되셨습니다.”
정의라는 말은 참으로 좋은 말입니다.
그리고 정의로운 사회는 우리가 이뤄야 할 사회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정의란 말에 대해 얼마간 거부감이 있습니다.
정의 피로감 때문이기도 하고
타락한 정의론 때문이기도 합니다.
정의 피로감이란 무슨 뜻입니까?
너무 오랜 ‘정의를 위한 불의와의 싸움’에 지친 것이지요.
후진국을 방문하다보면 우리도 한 때 이랬었는데 하며
우리 사회가 많이 정의로운 사회가 되었음을 느낍니다.
그런데 비록 아직 멀었지만 이 정도의 정의로운 사회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야 했고
얼마나 많은 투쟁이 있어야 했습니까?
그러니 이렇게 투쟁적인 정의 구현에는 피로를 느낄 만도 하지요.
저도 이렇게 이뤄낸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와 정의 실현에 대해
한 편 자부심을 느끼면서도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정의를 실현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불의 바이러스를 차단하기보다 정의 바이러스를 퍼트리는 것입니다.
요즘 구제역 사태와 관련시키면
유용미생물(EM)로 구제역 바이러스를 예방하고 퇴치하는 것과 같고
미워하지 말자라고 하기보다 사랑하자고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것이 더 적극적이고 긍정적이며 부작용도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더 적극적이고 긍정적이며
부작용도 없는 방법을 쓰지 않습니다.
그것은 평소 기초체력을 단련하여 병을 예방하는 것보다
병에 걸리면 약을 먹는 것이 더 간단하고 쉬우며
유용 미생물을 쓰는 것보다 항생제를 쓰는 것이 쉽고
사랑하는 것이 미워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힘들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정의론도 정화해야 합니다.
불의를 고발하기보다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지만
정의를 구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진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진정성이 없을 때 정의론은 타락합니다.
얼마 전 우리 대통령이 공정에 대해서 얘기할 때
저는 제 귀를 의심하면서도 반가웠습니다.
대통령 혼자 공정을 외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지만
그래도 대통령의 의지가 확고하기만 하면 많이 나아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공정과 정의만 타락시키고
지금은 그 말이 싹 사라졌습니다.
악어의 눈물과 같이 진정성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올 들어 가장 추울 때 어떤 분과 만나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분의 사업이 큰지 작은지 모르지만 아무튼 사업하는 분입니다.
추위에 떠는 가난한 사람들과 노숙자들에 대한 뉴스를 보다가
당신은 혼자 넓은 집을 뜨끈하게 하고 사는 것이 마음에 걸려
집 온도를 낮추고 내복을 꺼내 입었다고 합니다.
적어도 이 정도의 진정성은 있어야 정의가 공염불이 되지 않지요.
아무튼 투쟁적인 정의, 독선적인 정의, 위선적인 정의로는
정의는 어림없고 평화는 더더욱 아득합니다.
어디에 치우치지 않는 불편부당함은 기본이고
생명을 진정 사랑하는 거기에 정의와 평화는 참으로 실현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정의와 평화의 임금은
“족보도 없고, 육적인 혈통과 관련된 율법 규정이 아니라,
불멸하는 생명의 힘에 따라 사제가 되셨습니다.”고 얘기합니다.
그는 또한 살렘의 임금, 곧 평화의 임금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으며, 족보도 없고,
육적인 혈통과 관련된 율법 규정이 아니라,
불멸하는 생명의 힘에 따라 사제가 되셨습니다.”
정의라는 말은 참으로 좋은 말입니다.
그리고 정의로운 사회는 우리가 이뤄야 할 사회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정의란 말에 대해 얼마간 거부감이 있습니다.
정의 피로감 때문이기도 하고
타락한 정의론 때문이기도 합니다.
정의 피로감이란 무슨 뜻입니까?
너무 오랜 ‘정의를 위한 불의와의 싸움’에 지친 것이지요.
후진국을 방문하다보면 우리도 한 때 이랬었는데 하며
우리 사회가 많이 정의로운 사회가 되었음을 느낍니다.
그런데 비록 아직 멀었지만 이 정도의 정의로운 사회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야 했고
얼마나 많은 투쟁이 있어야 했습니까?
그러니 이렇게 투쟁적인 정의 구현에는 피로를 느낄 만도 하지요.
저도 이렇게 이뤄낸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와 정의 실현에 대해
한 편 자부심을 느끼면서도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정의를 실현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불의 바이러스를 차단하기보다 정의 바이러스를 퍼트리는 것입니다.
요즘 구제역 사태와 관련시키면
유용미생물(EM)로 구제역 바이러스를 예방하고 퇴치하는 것과 같고
미워하지 말자라고 하기보다 사랑하자고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것이 더 적극적이고 긍정적이며 부작용도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더 적극적이고 긍정적이며
부작용도 없는 방법을 쓰지 않습니다.
그것은 평소 기초체력을 단련하여 병을 예방하는 것보다
병에 걸리면 약을 먹는 것이 더 간단하고 쉬우며
유용 미생물을 쓰는 것보다 항생제를 쓰는 것이 쉽고
사랑하는 것이 미워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힘들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정의론도 정화해야 합니다.
불의를 고발하기보다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지만
정의를 구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진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진정성이 없을 때 정의론은 타락합니다.
얼마 전 우리 대통령이 공정에 대해서 얘기할 때
저는 제 귀를 의심하면서도 반가웠습니다.
대통령 혼자 공정을 외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지만
그래도 대통령의 의지가 확고하기만 하면 많이 나아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공정과 정의만 타락시키고
지금은 그 말이 싹 사라졌습니다.
악어의 눈물과 같이 진정성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올 들어 가장 추울 때 어떤 분과 만나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분의 사업이 큰지 작은지 모르지만 아무튼 사업하는 분입니다.
추위에 떠는 가난한 사람들과 노숙자들에 대한 뉴스를 보다가
당신은 혼자 넓은 집을 뜨끈하게 하고 사는 것이 마음에 걸려
집 온도를 낮추고 내복을 꺼내 입었다고 합니다.
적어도 이 정도의 진정성은 있어야 정의가 공염불이 되지 않지요.
아무튼 투쟁적인 정의, 독선적인 정의, 위선적인 정의로는
정의는 어림없고 평화는 더더욱 아득합니다.
어디에 치우치지 않는 불편부당함은 기본이고
생명을 진정 사랑하는 거기에 정의와 평화는 참으로 실현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정의와 평화의 임금은
“족보도 없고, 육적인 혈통과 관련된 율법 규정이 아니라,
불멸하는 생명의 힘에 따라 사제가 되셨습니다.”고 얘기합니다.
지금 이것을 사랑으로 합니다.
제 입에서 나오는 말에 "진정성"이 없을 때
그 말은 소리에 불과할 것이며 그렇게 하는 기도가
어떻게 하늘에 닿을 수 있으며 상대의 심금을 울릴 수 있을까 싶습니다.
문제는 제 자신이 진정성을
지닌 사람이 되는 것이 먼저일 겁니다.
모든 것은 사라져도 사랑과 진실만이
남는다는 말처럼 말입니다.
그런 제 자신을 위해 기도해야 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