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공동체 형제들과 연극을 관람했습니다.
‘기후 비상 시대-리허설’이라는 연극을 보기 위해 명동 국립 극장을 가는 전철에서
책을 보고 있는 한 친구를 보게 되었는데 요즘 책을 잘 안 보는 시대에 책을 보니,
그것도 젊은 친구가 보니 그 자체가 관심이 가서 무슨 책을 보나 살짝 엿봤습니다.
그런데 책 제목이 ‘이런 사람 만나지 마세요.’였습니다.
무슨 이런 책이 있을까 생각이 되면서도
오늘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축일을 묵상하며 가던 길이었기 때문인지
만남이라는 주제와 즉시 연결이 되면서 어떤 만남은 가져야 하고,
어떤 만남은 우리가 그 만남을 피해야 할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피해야 할 만남 하면 즉시 나를 유혹한다든지 피해를 주는 사람이 생각이 나고,
요즘은 상처에 민감하고 조그만 부담도 못 견뎌 하니
상처를 주는 사람이나 부담을 주는 사람이 이내 생각이 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 책이 이런 유의 사람을 만나지 말라는 것이라면
읽어야 할 책이 아니고 우리도 이런 이유로 누구를 만나지 않아서 안 될 것입니다.
제 생각에 우리가 진정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은 상대가 누구냐가 아니라
내가 어떨 때 누구를 만나지 말아야 할지를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만나기만 하면 남 흉을 보게 되는 그런 사람을 만나지 말아야 하는데
그런데 그 이유도 그 사람이 남 흉을 잘 보는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흉을 보고 싶을 때 그 사람을 만나기 때문이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외로울 때 만나고 싶은 사람도 제 생각에 만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외로움이 병이 될 지경이라면 만나야 되겠지만
제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영적인 이유 때문임을 여러분은 아실 겁니다.
외로울 때는 주님을 만나는 영적인 때인데
이 영적인 좋은 때를 날려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적극적으로 만나야 할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위로보다는 격려를 나누는 사람,
서로 영감을 주고 열정을 북돋는 사람,
이웃 사랑을 위해 같이 좋은 일을 할 사람,
위의 목적을 위해 같이 책을 읽고 나누기를 하는 사람,
뭐 이런 사람들이 퍼뜩 떠오르는데 우리 신앙인이게는
오늘 마리아에게 엘리사벳과 같은 사람, 엘리사벳에게 마리아와 같은 사람일 겁니다.
험담을 하기보다는 기도를 하기 위해 만나는 사람,
오늘 마리아와 엘리사벳처럼 자기에게 내린 은총과
주님의 구원 업적을 나누고 찬양하기 위해 만나는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그저 친척 사이이기에 만난 것이 아니고,
동병상련의 처지에서 서로 위로하기 위해서 만난 것도 아니고,
같이 특별하게 임신한 사이이기에 만난 것도 아니고,
요즘 젊은 엄마들처럼 태교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보를 나누거나 친교를 나누기 위해 만난 것은 더더욱 아니고,
자신들 안에서 그리고 자신들을 통해서 이룬 구원 업적을 같이 찬양하기 위해섭니다.
오늘은 늦잠을 자는 바람에 여기서 나눔을 그쳐야 하는데,
아무튼, 우리는 오늘 우리의 만남이 어떻고 또 어떠해야 하는지를
오늘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축일을 기해 돌아보는 날이 되면 좋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