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를 제외하고 유일신을 믿는 종교들은 삼위일체를 얘기하지 않는데
만일 하느님이 삼위일체가 아니라면 그런 하느님은 믿지 말아야 할까요?
바꿔 말하면 삼위일체의 하느님만 믿어야 할까요?
과격하게 얘기하면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꼭 믿지 않아도 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은 꼭 삼위일체가 아니어도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사랑이 아니시면 안 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아니면 더욱 안 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아니라면 안 믿어도 됩니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이 삼위이시건 아니건,
하느님이 한 분이시건 아니건 상관없으며,
우리는 다만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것과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마치 사랑치 않는다면 부모가 열이든 하나든 우리에겐 상관없는 것과 같고,
사랑한다면 완전한 사랑으로 사랑하는 부모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면 삼위일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리스도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삼위일체라면 삼위로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당신들이 창조한 피조물을 삼위로 구원하신다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믿음입니다.
사랑이시라면 삼위일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사랑의 신비입니다.
사랑은 혼자서 할 수 없는 것이 단적인 예입니다.
예를 들어 인간의 경우 외톨이는 사랑할 수 없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외톨이가 되는데
그래도 사랑하고 싶으면 개라도 사랑하듯이 사랑에는 짝이 있어야 합니다.
어쨌거나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삼위일체이신데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성부라고 하고,
사랑받으시는 하느님을 성자라고 하며,
성부와 성자 간에 오가는 사랑을 성령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부부간의 사랑처럼 하느님 안에서 내재적으로 이뤄지는 사랑이라면
부부의 사랑이 자녀를 생산하듯 하느님에게서 발출하는 사랑이 창조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사랑은 어떤 사랑이건 이처럼 늘 창조적이고 생산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활동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습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고목과 같고,
사랑하지 않는 것은 불임과 같습니다.
그런데 사랑이 없지 않지만, 그 사랑이 불완전할 수도 있고,
이 불완전한 사랑이 미움인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부부가 서로 사랑하여 결혼하고 애를 낳았지만
그 사랑이 불완전하면 사랑이 미움으로 바뀌어 서로를 파괴하고 자신을 소모하며
더 나아가 자녀에게 부모로서 온전한 사랑을 주지 못하여 아이를 망칠 수 있지요.
이 경우, 엄마로서 또는 아버지로서는 자녀에 대한 사랑의 책임을 다했어도
부모로서는 사랑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게 되는데
삼위일체의 하느님은 그 사랑이 완전하여 당신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끝까지
그리고 완전하게 사랑하시는데 그것을 일컬어 우리 교회는 구원이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삼위일체적으로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삼위일체적으로 구원하시기 위해 성자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성자를 뒤이어 성령을 보내셨다고 믿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교 믿음입니다.
이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먼저 삼위일체적인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
편부 또는 편모의 사랑이 아니라 부모의 온전한 사랑을 받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에서 하느님의 큰 사랑을 느낄 것이고,
내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작용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또한 느낄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할 것은 삼위일체적인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말과 행동으로 느낄 수 있게 사랑할 것입니다.
성령처럼 기도로 그 사람 안에 힘과 기를 북돋는 사랑을 할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임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