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착한 사마리아인(The good samaritan), 1562-1563
작 가 : 야고보 바사노(Jacopo Bassano, 1510-1592)
크 기 : 캔버스에 유채 102cm X 79.9cm
소재지 : 영국 런던 국립 미술관
10여 년 전 독일의 개신교 출신의 신약 성서학자인 루데만은 신양성서 전체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장 정확히 표현한 것은 우리에게 너무 잘 알려진 “돌아온 탕자”와 이 작품의 주제인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것이란 폭탄선언을 했다.
원체 지성적인 표현이 몸에 익은 독일 신학자의 견해가 좀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면은 없지 않지만, 이 두 주제가 복음의 핵심적 내용을 전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말씀이라는 것을 너무 일방적으로 떠드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는 위험이다.
말씀이 다른 연설과 다른 것은 말 자체가 설득력이 있다거나 합리적인 면이 있다는 것과는 무관하게 그것이 실천으로 이어졌을 때 효력이 발생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교회는 이런 관점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자랑이고 자부심이기도 한다.
근 40년 이상을 소록도에서 한센병 환우들이 가족처럼 여기며 살다가 고국인 오스트리아로 귀국한 마리안느와 마가렛 수녀님들의 삶은 바로 이 작품의 주제를 우리들의 현장에서 실천한 산 증인들이기에 신자 비신자 구분이 없이 많은 국민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이 내용은 너무 간단하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가는 길에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반죽음이 된 처지에서 그 곁은 지나가던 세 부류의 서로 다른 신분의 사람들이 보인 태도이다.
이 복음에 등장하는 예루살렘과 예리코의 길은 사막이라 인적이 드문 곳이라 산적이나 강도를 피하고자 여러 사람이 떼를 지어 다녀야 하던 길인데, 어느 사람이 혼자 가다가 가진 것 다 털리고 반죽음 상태에 놓이게 되어 삶에 대한 본능적 도움을 청하게 되었다.
그런데 지나가던 사람 중 당시 이스라엘 최고 지파에 속하는 레위인이 지나가다가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이 사람의 요청을 외면하고 그냥 지나치게 된다.
그다음 항상 신자들에게 언제나 선행을 하라고 가르치는 사제가 지나가다가 그 역시 그를 피해 지나가게 된다.
주위에 다른 행인이 있었다면 자기 신분에서 오는 체면 때문에도 마지못해서라도 이 부상자에게 신경을 쓰게 될 것인데, 다행히(?) 주위에 다른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언제 내가 너를 보았느냐는 듯이 성경책만 꼭 안고 지나친다.
도와줄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당한 이 사람은 삶의 희망이나 인간에 대한 신뢰를 상실한 채 절망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엉뚱한 사람이 나타나서 도와준다.
한데 이 사람은 유대인들이 상종도 하기 싫어하는 천민인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서로 앙숙으로 미워하는 사이였기에 사마리아 사람의 정서라면 그 사람을 치료해주기보다 모른 척하거나 아니면 해를 끼칠 수도 있었는데, 그는 전혀 다르게 이 가련한 사람을 지성으로 치료해주고 여관 주인에게 후한 사례도 하면서 혹시 더 돈이 필요하다면 다음 기회에 자기가 올 때 꼭 갚겠다는 약속까지 한다.
주님께서는 앞에서 하신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관계에 관해 묻는 사람에게 바로 이 교훈을 들려주시며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 37)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모든 크리스천에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이기에 독일 신학자가 이 내용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이런 면에서 일리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작가는 베네치아의 전성기 르네상스 예술이 대단히 꽃피었을 때 활동한 작가이며 그의 작품 전체가 성화일 만큼 신앙적 내용의 표현을 강조했다.
먼저 이 작품은 성화이면서도 다른 성화와 다른 것은 인물의 묘사와 함께 주변의 배경과 풍경에도 많은 신경을 쓴 것이다.
작가는 사막 지대인 예루살렘과 예리코가 아닌 자기 고향인 베네토의 산천을 배경으로 했다.
이탈리아 북부에 속하는 이 지방에는 알프스가 가깝기에 아름다운 산천이 있었는데 작가는 바로 이 배경을 사용함으로써 이 복음적 배경이 바로 자기 지방이라는 것의 강조로 이 작품을 보는 사람들에게 복음 이해의 친근감을 줄 수 있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루카 10, 36-37)
사마리아인이 다친 사람의 뒤를 부축하고 있다.
다친 사람은 가진 것을 다 빼앗긴 듯 거의 알몸에 가까운 수준인 것은 그가 가진 것을 다 빼앗긴 상태에서 의지할 데는 하느님밖에 없는 존재임을 상징하고 있다.
이때, 이 불쌍한 사람을 돕기 위해 접근한 사람은 하느님의 화신이며 그러기에 작가는 우리가 하느님을 전한다는 것은 그분에 대해 알리는 게 아니라 그분의 모습을 보이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바로 이 환자를 도움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을 보이는 것이다.
헌데 놀라는 것은 이 사람은 소위 열심하게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그 시대 어디 서나 만날 수 있는 그 시대 베네치아 저잣거리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인물로 등장시키고 있다.
그는 앞으로는 환자를 부축하고 있지만 그의 옆구리에는 강한 환도를 차고 있다.
그는 자기를 지키기 위해선 무기를 소유할 만큼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는 붉은색 상의와 푸른색 하의를 입고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을 초상화에서 필수적으로 사용되던 색깔 즉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표현이다.
작가는 여기에서 다친 나그네를 돌보는 이 사람은 단순한 선행을 하는 착한 사람이 아니라 예수의 삶을 현실화하는 사람이기에 삶의 처절한 현장에 강림한 예수의 모습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이것이 바로 세상 속의 크리스천들이 보여야 할 모습이다.
여기에 비해 사제와 제관은 그들의 타이틀과 다르게 위선자 하느님의 모습을 가리는 자들이기에 어둠의 자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얼마 후 그들은 자기 교회에 도착해서 신자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떠들 불쌍하고 추한 위선자들이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위선자는 항상 교회 안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성서는 이 삶의 역설을 다음과 같이 드러내고 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마태 23, 13)
예수께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시며 여기에 반대되는 삶의 모습으로 제시한 것이 바로 위선자와 이중 연격자의 삶이며 그 모델로 등장하는 게 바로 사제와 레위 지파의 사람들이다.
성직자 수도자들처럼 가장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가르치는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위선과 자기 삶을 꾸리기 위해 힘겹게 살면서도 평범한 사람들인 사마리아 사람에게 볼 수 있는 너무도 맑고 따뜻한 표현을 통해 성서는 우리에게 알리고 있다.
너희들은 사제와 레위 지파의 탈을 쓰고 예수를 욕되게 하는 위선의 삶을 살지 말고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평범한 인간의 모습 안에서 예수의 사랑이 보이도록 노력해야 한다.
예수의 제자로서 복음을 산다고 떠드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에서 보여야 할 바른 처신의 모습을 보이면서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선 순수한 마음 하나뿐임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파격적이며 충격적으로 이 복음의 내용을 극찬한 루데만 학자의 주장은 이론적으로는 문제가 될 수 있으나 현실적으로는 너무도 타당한 내용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