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위의 말씀은 이사야서의 말씀으로 주님께서 바로 이런 분이라고
오늘 마태오 복음은 얘기합니다.
그런데 올바름을 선포하되 다투거나 소리치지 않아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할 거라고 하는데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리고 그런데도 민족들이 그에게 희망을 건다는데 이것은 또 무슨 뜻입니까?
정의를 선포하지만 다투지도 소리치지도 않는다니
제 생각에 그것은 자기 정의를 가지고 싸우느라 언성을 높이지 않고,
같은 맥락에서 자기주장을 강하게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역시 제 생각에 내가 의롭다고 하는 것은 하느님 정의에 역행하기 쉽고,
상대의 정의를 인정하지 않고 나만 정의롭다는 것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제가 자주 얘기하는 거지만 우리는 모든 진리의 일리만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모두는 모든 진리의 한 부분만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네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얘기할 수 있어야 하고,
그렇게 말하는 우리는 나도 일리만 가지고 있다고 얘기할 수 있어야겠지요.
이것이 겸손한 정의라면 사랑의 정의도 있습니다.
생명을 사랑하는 정의 말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정의는 이기주의적인 공정과 다릅니다.
제 생각에 요즘처럼 공정이 이기주의에 오염되면 그 정의는
자기의 이익과 권리, 자기의 생명과 삶을 지키려는 정의로 왜곡됩니다.
이에 비해 사랑의 정의는 다른 사람 특히 약자의 이익과 권리, 생명과 삶을 지키는 정의,
오늘 복음이 얘기하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는 정의입니다.
그런데 사랑의 정의야말로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진정한 강자의 정의입니다.
왜냐면 약자는 주님처럼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기는커녕
자기의 이익과 권리, 생명과 삶을 지키기도 벅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젊은이들의 공정을 이기주의적이라고 비판하면서도
이들이야말로 지극히 경쟁적이고 약육강식의 자본주의 시대의 약자요
희생자이기에 이들에 대한 진정한 연민도 가지고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저희가 하고 있는 여기 국밥집은 3,000 원짜리 식당이고,
동사무소와 협력하여 지역 내 어려운 분에게는 무료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근자에 젊은이들이 종종 무료 식권을 가지고 옵니다.
며칠 전에도 한 젊은이가 식권을 가지고 와서 식사를 하며
고시원에서 밥은 주니 비빔밥 재료를 2,000 원에 줄 수 없냐고,
그것도 한 주일치를 한꺼번에 줄 수 없냐고 하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양을 많이 그리고 옥수수도 주면서 힘내라고 했더니
자기가 냉담자인데 성당 나가야겠다고 웃으며 얘기합니다.
웃으며 얘기하는 그의 등을 두둘겨주며 그의 엄마를 생각하며 마음이 아팠습니다.
국가적으로는 우리나라가 부자이고 경쟁력을 가진 나라지만
꺾인 갈대처럼 기가 꺾이고 꺼져가는 심지처럼 의지가 꺼져가는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 식당이 해야 할 일은 밥을 싸게 많이 주는 것 이상으로
꺾인 기를 살리고 꺼져가는 의지를 살리는 일이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