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오늘 주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셨다고 하시며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시는데
주님 바람대로 제가 타오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합니다.
전에 얘기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나이를 먹어가면서 불이 꺼져가는 것 같습니다.
점점 더 타올라야 하는데 말입니다.
저도 한때 불이 활활 타오르고 마른 짚단, 젖은 짚단
가리지 않고 불사르던 때가 있었는데 점점 사그라든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그 분기점이 바로 관구 봉사자 때였습니다.
그전까지는 형제들에게 악역을 담당하고 갈등을 겪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그것을 견디어내는 힘도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감수하고 감당할 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관구 봉사자를 끝내고 나니 진이 다 빠진 것처럼 더 이상 그럴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6년 임기를 마치고 다시 관구 봉사자 후보가 되었을 때
형제들께 이젠 형제들을 미워하거나 갈등하면서까지 사랑할 힘이 없는 것 같다고
양해를 구하고는 저를 뽑지 말아 달라고 했지요.
그리고 그다음에도 본원 원장에다 수련장에다 여러 큰 책임을 맡았는데
갈수록 힘이 떨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쓴소리하고 갈등을 감수하는 사랑은 싫고 그저 좋은 말,
격려의 말만 하고 힘들 때 힘이 되어주는 정도의 사랑만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젖은 짚단은 피하고 마른 짚단만 불태우려고 하였습니다.
젖은 짚단을 태우려다가는 제 불마저 꺼질 것 같았습니다.
사실 제 불이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고 활활 타오르는 불이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한 젖은 짚단을 태우다가는 잘 타고 있던 나의 불도 꺼질 것입니다.
불은 서로 불을 붙이며 타오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자주 느끼는 것이 이것입니다.
공동체를 위해 나를 바쳤는데 주변에서 냉담하면 그 열정이 사그라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쓸데없이 바친 것에 대해 후회하고, 공동체를 원망하고,
공동체에 정나미가 떨어지고, 마침내 더 이상 공동체를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고,
심지어 공동체를 떠나는데 우리는 여기서 공동체를 원망할 것이 아니라
나의 사랑을 잘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하고 싶고 내 사랑의 불이 타오르고 싶습니다.
그래서 내 사랑의 불이 너에게도 불을 붙여 같이 불타오르는 보람이랄까
기쁨이나 사랑의 충만을 주는 ‘마른 짚단의 너’이고 동동체이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른 짚단이 아니고 젖은 짚단들입니다.
너만 나에게 젖은 짚단이 아니고 나도 너에게 젖은 짚단이라는 뜻입니다.
젖은 짚단을 태우다 보면 연기가 나고 눈물을 흘려야 하며,
젖은 짚이 마를 때까지 인내의 시간이 있어야 하고
그런데도 계속 불이 꺼지지 않고 타는 불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불이 그런 불이 아닌 것이 문제이고,
나에게 알 불이 없는 것이 문제이고 알 불을 잘 간수치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니 나에게 알 불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성령입니다.
성령의 불이 내 안에 있어야 내 불이 꺼지지 않고 젖은 짚단까지 불태웁니다.
성령의 불이 있어야 하느님 나라의 정의에 대한 열망이 꺼지지 않고,
불의에 대하여 분노하면서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며,
성령의 불이 있어야 너의 고통과 나의 고통을 다 견딜 수 있고,
성령의 불이 있어야 고통 가운데서도 사랑을 계속할 수 있으며,
성령의 불이 있어야 고독 가운데서도 사랑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화로에 알 불을 잘 간수하듯
알 불 곧 성령을 잘 간수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일을 하든 학문을 하든 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내 안에 모셔 들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성령의 불이 내 안에서 꺼지지 않도록 기도 생활을 잘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