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또한 복되십니다.”
어제와 그제는 제가 모처럼 여유로운 시간을 가지며 충전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제는 모든 약속이 취소되는 바람에,
어제는 본래 미사 두 대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던 거지요.
그래서 어제 오후에는 성모 승천 대축일을 앞두고 경당에서
빅토리아의 아베 마리아를 연속적으로 들으며 묵상했는데
문득 마리아의 ‘예스’와 ‘노우’라는 주제가 떠올랐습니다.
성숙한 사람이라면 ‘노우’라고 할 수 있어야 하고,
‘노우’라고 할 수 없는 사람은 미성숙하다고 보통 얘기합니다.
그런데 ‘예스’라고 할 수 없는 사람도 미성숙하고 어쩌면 더 미성숙합니다.
‘예스’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은 아무것도 포용하지 못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사실 성숙하고 지혜롭고 그래서 행복한 사람은 ‘노우’해야 할 것은 ‘노우’하고
‘예스’해야 할 것은 “예스”할 줄 아는 사람이고,
무엇은 ‘예스’하고 무엇은 ‘노우’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기준은 행복입니다.
행복에 이바지하는 것은 ‘예스’하고 불행케 하는 것은 ‘노우’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행복케 하고 무엇이 불행케 하는 것인지 또 묻게 되겠지요.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마리아가 그 신앙적인 기준을 제시해줍니다.
하느님은 ‘예스’하고 악마는 말할 것도 없고 악마적인 것은 ‘노우’합니다.
그런데 하느님도 알고 악마도 알겠는데, 악마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리아처럼 하느님을 잉태해야 하는데 그것을 방해하는 것이고,
하느님을 묵상하고 관상해야 하는데 그것을 방해하는 것이며,
하느님을 출산하고 전파해야 하는데 그것을 방해하는 것이고,
오늘 축일과 연결하면 하느님께 가야 하는데 그것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이 세상을 떠나 하느님께로 가시고
우리도 같은 길을 가야 하는데 마리아는 길잡이시라고
오늘 감사송은 이렇게 아름답게 노래합니다.
“동정 마리아께서는 완성될 주님 교회의 시작이며 모상으로서,
나그넷길에 있는 주님의 백성에게 희망과 위안을 보증해 주셨나이다.”
하느님 나라는 이 세상 곧 ‘지금, 여기’서 시작되어 저 세상에서
완성되는 것이라고 우리는 자주 얘기하는데 완성될 주님 교회도 마찬가집니다.
주님의 교회는 베드로를 반석 삼아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세우셨지만
그 완성은 이 세상이 끝나고 하늘나라에서인데
마리아는 그 완성될 주님 교회의 시작이며 모상이라고 얘기하고 있고
우리도 그 나그넷길을 가는 존재라고 오늘 감사송은 노래하는 겁니다.
우리 모두 이 세상 나그넷길을 마리아처럼 그리고 마리아와 함께
잘 가서 하늘나라에서 모두 모이면 그것이 완성된 주님 교회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은 떠나가고,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고,
주님과 마리아를 따라 가면 되겠습니다.
나이 든 사람이라면 ‘하숙생’이라는 노래를 다 알 것입니다.
“인생은 나그넷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나그넷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
이 노래처럼 우리는 이 세상의 하숙생이고,
어디로 가느냐 하면 하느님 나라를 향해, 승천이라는 나그넷길을 갑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정처가 없고 하느님 나라가 정처가 되어야 하는데
이 세상에 정과 미련을 두게 하는 것은 ‘노우’하고
떠나게 하는 것은 ‘예스’하는 것을 마리아에게서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