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욥은 자기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고 자기 인생을 저주합니다.
“욥이 입을 열어 제 생일을 저주하였다. 욥이 말하기 시작하였다.
‘차라리 없어져 버려라, 내가 태어난 날, 사내아이를 배었네! 하고 말하던 밤!’”
그런데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어제 자신의 재산과 종들과 가족을 다 잃고 난 뒤에도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라고
하느님을 찬미한 그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된 것입니까?
그것은 욥의 고통이 한층 더 커졌기 때문입니다.
아니, 한 층이 더 커진 것이 아니라 두 층, 세 층이 더 커진 때문입니다.
어제 얘기에서도 욥의 고통은 가중되었었지요.
먼저 소와 머슴들이 죽고, 그 다음에 양과 머슴들이 죽고,
그 다음에 낙타와 머슴들이 죽고, 그 다음에 자식들이 다 죽었지요.
이때까지는 하느님이 주셨던 것 하느님이 가져가시니
하느님은 찬미 받으시라고 하느님 찬미를 합니다.
이것만도 사실 하느님께 대한 대단한 믿음이요 사랑입니다.
그런데 소유물에게는 손을 대도 욥에게만은 손을 대지 말라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사탄이 욥의 목숨에는 손을 대지 않았지만
지독한 피부병을 앓는 고통을 안겨주었고 그래서 욥은 저주하기 시작합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면 차라리 내가 아픈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생각일 뿐이고,
고통을 실제로 겪게 되면 욥처럼 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너의 죽음보다 내 몸의 가려움이 더 큰 고통이고,
너의 다리 절단보다 내 손의 가시가 더 아픕니다.
그러므로 찬미하던 욥의 입에서 어떻게 저주가 나오는지
우리는 이렇게 이해해야 하고 같은 맥락에서
저는 저를 반성하고 해결해야 할 과제를 숙제처럼 안고 있습니다.
왜냐면 저는 한 번도 저의 출생과 인생을 저주한 적이 없습니다.
사춘기 때 빼고 한 번도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으며
그래서 한 번도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고통이 없었다는 얘기가 아니라
이렇게 큰 고통을 겪은 적이 없었다는 얘기이고,
그러니 이런 제가 고통이니 사랑이니 감사니 찬미니 얘기하는 것이 어쭙잖습니다.
저는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특히, 일생을 장애를 안고 사는 분들이나 지병을 앓는 분들 앞에서
저는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없고 인생이 뭔지 안다고 할 수 없는 존재인데
수도자이기 때문에 그리고 사제이기 때문에 인생을 운운하고
저보다 더 크고 더 긴 고통을 겪는 분들에게 위로니 격려니 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저주를 볼 때 어제 욥의 찬미는 섣부른 찬미였다고 할 수 있는데
욥처럼 큰 고통을 겪는 분들을 볼 때 저의 사랑 찬가나 하느님 찬미는
욥의 찬미보다 훨씬 더 섣부른 찬미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섣부른 찬미가에서 성숙한 찬미가가 될 수 있도록
큰 고통을 주십사고 청하지도 못하는 저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새벽,
비록 이 섣부른 찬미가인 제가
저 스스로 큰 고통을 주십사고 청하지는 못하지만, 저에 대한 사랑 때문에
주님께서 더 큰 고통을 제게 주실 때 잘 견딜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