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불안을 내어 맡겨라
나에게 있어 성장과 변화의 길로 나를 안내하는 깨달음은 단순하고 유약하게 표현되는 내면의 불안을 주님께 내어 맡기려는 가운데 경험했다. 그것은 상처받기 쉬운 상태로 나를 개방하려는 순수한 갈망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위해 나의 자유를 그분께 맡겨드리면 드릴수록 더 자유롭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내어드리는 만큼 커지는 자유는 관계의 상호성 안에서 감동과 더불어 벅찬 기쁨으로 선의 영역을 확장하고 변화와 성장의 기회가 되었기에, 정직하고 단순하게 표현하는 아이들처럼 유아적 단순성과 연약함을 드러내는데 머뭇거리지 않게 되었다. 내면의 불안을 주는 수치를 감추기 위해 생명의 에너지를 낭비하는 일이 점점 줄어들게 된 것이다. 상처받기 쉬운 상태로 위험을 감수하는 이러한 내면의 개방은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과 연결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내어주는 사랑과 받아들이는 사랑에서 주고받음이 성장한다. 하느님의 선하심에 참여하는 이러한 사랑은 노력하지 않아도 발산하는 기쁨으로 주변을 밝힌다. 다른 이에게 선물이 되는 반사된 선은 나에게서 너에게로 흘러 서로에게 깊은 만족을 주기 때문이다. 수치와 불안을 감추고 두려움 속에서 사는 이들은 성장을 멈춘 아이들과 다르지 않다. 변화와 성장은 위험을 감수할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영과 그 활동을 몸과 마음에 간직하는” 것과 생명을 선사하는 반사된 선의 흐름 속에서 서로의 마음을 헤아려주고 부축하려는 의지가 “행동으로 표현되는 믿음” 안에서 구체적으로 하느님 나라의 실재를 관계 속에서 경험하도록 이끌어 준다.
매력으로 이끄는 성령은 변화를 두려워하는 세상의 거친 풍랑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다가가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신다. 두려움과 불안은 처벌받지 않을까? 하는 데서 나온다. 그러나 실제로는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나이가 많을수록 변화를 싫어한다. 꼭대기를 점령한 이들이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고 눈이 멀어 저지르는 죄, 신성한 이 흐름을 막는 관계의 단절이야말로 성령을 모독하는 죄이다.
도덕적으로 완벽하게 되는 것도, 올바른 존재가 되려는 것도, 상관이 없다. 다만 치유되기를 원하는가에 달려있다. 치유는 변화를 받아들여야 가능하다. 내면의 불안과 양심의 불안을 주는 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나를 변화시키도록 허용하고, 나를 만지도록 이 흐름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만이 중요하다. 영의 활동을 보는 관상은 반사된 선의 흐름을 보는 것이다. 피조물을 통해 반사된 선의 아름다움이 매력으로 끌어당기시는 영의 활동이며 이 흐름을 인지하고 누리며 사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의 전부다.
내면의 불안을 내어 맡겨라, 당신이 몸소 해 주시리라
치유가 불러오는 변화
변화가 불러오는 자유
안심해라 변화를 허용하는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