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오늘 주님께서는 바리사이의 질문에 동문서답하시는 듯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시느냐는 질문에 언제라는 답이 아니라
너희 가운데 곧 우리 가운데 있다고 하시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대답이 동문서답이 아니라 정답이라고 우리가 믿는다면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는 뜻이 되겠지요
사실 주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이 말씀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사람에게는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와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하느님 나라는 ‘아직’이라는 뜻이 되겠는데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하는 것도 복음을 믿는다는 것도
하느님 나라 관점에서 봐야 할 것입니다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보지도 만나지도 못한 사람은
아직 회개한 사람이 아니요, 복음을 믿는 사람이 아니지요.
달리 말하면 회개를 하더라도 하느님 나라의 회개를 해야 하는 거지요.
사실 회개에는 여러 회개가 있습니다.
인간적인 회개와 영적인 회개가 있고,
인간적인 회개에도 마음이나 습관을 바꾸는 개인적인 회개와
용서와 화해를 통해 나쁜 관계를 좋은 관계로 바꾸는 관계적 회개가 있습니다.
사실 이런 회개만도 우리에게 벅차기에 이 회개를 위해서도 낑낑대니
이 회개를 하는 것만으로도 제법 훌륭하다 할 수 있겠지만
우리에게는 영적인 회개 곧 하느님 나라의 회개가 궁극적 회개입니다.
곧 하느님 나라에 깨어있는 회개입니다.
하느님 나라 무감각에서 깨어나는 회개라고도 할 수 있고,
영적인 감각 또는 하느님 나라 감각이 깨어나는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감각이 깨어있으면
아들에게 깨어있는 어머니가 아들의 냄새를 맡고 어둠 속에서도
아들이 곁에 있음을 알아채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의 임재를 알아챕니다.
호렙산의 엘리야에게처럼 바람결에 실려 오는 하느님 나라,
떨어지는 나뭇잎과 함께 내려오는 하느님 나라,
새벽 실안개처럼 우리 어깨 위에 살며시 내려앉는 하느님 나라를 느낍니다.
영적인 감각이 깨어있는 사람에게는
지인이 보내오는 문자 하나도 그저 문자가 아니라
사랑이 온 것이요 하느님이 오신 것으로 느낍니다.
문득 가을을 느끼듯
우리 가운에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이제라도 문득 느낀다면
그것만으로도 참으로 다행이라는 성찰을 하는 오늘 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