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 기도와 지향
2022년 12월 21일 수요일
교부들의 말씀 묵상
요한, 엘리사벳, 마리아에게 충만하신 성령
그때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충만했고, 그는 아들 덕분에 성령을 받았습니다. 어머니가 먼저 성
령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아직 어머니 태 안에 있던 요한이 먼저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아들이 성화된 다음에, 어머니가 성령으로 충만해졌지요. 여러분이 우리 구원자의 경우에도 이와 비슷했음을 알면 이 사실을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몇몇 문헌에 따르면, 복되신 마리아께서도 예언을 하셨다고 하며, 엘리사벳이 예언으로 이 말을 했다고 기록한 복음서 사본들이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마리아 또한 구원자를 잉태하면서 성령으로 충만해지셨습니다. 그분께서 주님의 몸을 지으신 성령을 받아들이자 곧바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그분 태 안에 거하기 시작하셨고, 그리하여 성령으로 충만해지셨던 것입니다.
-오리게네스-
성인 / 영적 글 묵상
50가지 예수 모습 / 안셀름 그륀
23. 문 예수
예수님은 어진 목자는 도둑이나 강도와 달리 문으로 들어가서 양들을 만날 수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이 바로 그 문이라고 하신다:
“나는 문입니다. 나를 통해 들어오면 누구나 구원받을 것이고 드나들며 목초를 찾아 얻을 것입니다”(요한 10,9). 예수님은 우리가 참된 삶 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우리의 문이 되려 하신다.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문이 되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분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만나지 못하고 자신의 참된 본성 속으로 들어가는 분을 잊고 있음을 벌써 보셨다. 그래서 말씀으로 문을 열어 사람들이 자신의 참된 본성과 하느님을 찾을 수 있게 해 주신다.(119)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12월 성령 열매성월 3주간 기쁨 / 선행
금주간 성서읽기 묵시 7-14장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2기 : 700 ∼ 1050년
제 1절: 빈프리트 보니파시오와 그리스도교적 유럽의 건설
보니파시오는 앵글로색슨의 대륙 선교사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었다.
그는 유럽의 중요한 열쇠가 되는 인물 중 한 사람이고, 유럽의 그리스도교적 민족 공동체의 개척자였다. 그의 중요성은 독일 선교에 있다기보다는 - “독일의 사도”란 존칭은 16세기에 바로소 그에게 주어졌다 - 오히려 그의 개혁적이고 조직적인 활동에 있다. 그리고 침체되어 있던 프랑크족의 영방교회를 보편교회적인 사고로 돌아오게 하고, 그것을 고립화에서 해방시키고 보편교회의 중심점인 로마와 결합시킨 결과에 있다. 이로써 그는 프랑크 왕국과 교황직 사이의 동맹을 준비하고 카를 대제에 의하여 지속되어 800년의 황제 대관과 962년 오토 대제에 의한 서방 황제권의 재건에서 정점에 이른 발전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가 없었다면 중세의 보편적 제국 사상은 생각될 수 없었을 것이다.
빈프리트 보니파시오는 672∼675년 사이에 웨식스 왕국에서 태어났다.
수도회의 헌신자로서 액세터와 너슬링 수도원에서 양육되고, 누트셀에서 당시의 교양 전체를 배웠으며 그후 자신도 그곳에서 교사로 활동하였다. 그는 716년에 프리즐란트의 빌리브로르도 밑에서 최초의 선교를 시도하였다. 정치 상황의 불리함, 무엇보다도 프리즐란트족의 장군 라드보트(+719)와 프랑크 왕국의 궁정 집사 카를 마르텔(714∼741) 사이에서 발생한 전쟁은 그를 곧 영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러나 718년에 그는 다시 유럽 대륙으로 출발하였다. 선교활동을 시작하기에 앞서 그는 교황 그레고리오 2세(715∼731)로부터 선교의 위임과 파견을 받기 위하여 로마로 갔다. 거기서 보니파시오라는 이름을 받았다. 719∼722년에 그는 선교사로서, 처음에는 프리즐란트에서 빌리브로르도의 협력자로서, 이어 상부 헤센과 튀링겐에서 독립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아뫼네부르크 수도원을 선교의 거점으로 창립하였다. 그 지방은 완전히 이교 지역은 아니었다. 아일랜드-스코틀랜드와 프랑크의 순회 선교사들이 여기저기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부정기적으로 나타남으로써 선교에 유익이 되기보다는 방해가 되었다. 보니파시오는 그들과 현지의 권세가들로부터 그의 목적을 성취하려면 더 큰 권위가 필요함을 깨달았다. 그래서 722년에 교황으로부터 직접 주교품을 받고, 카를 마르텔 앞으로 보내는 추천서를 받기 위하여 두번째로 로마로 갔다. 이 기회에 그는 이른바 로마 접속 영역의 주교 선서를 하였다. 그것은 로마 근교에 있는 일곱 개 주교좌의 주교들 - 알바노, 오스티아, 포르토 상타 루피나, 팔레스트리나, 사비나 포지오 미르테토, 프라스카티 투스쿨룸,, 밸래트리 - 이 교황에 대하여 하게 되어 있었고, 또한 그것은 그들에게 로마와의 특별히 긴밀한 단결과 일치를 의무지우는 것이었다.(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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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 기도의 집은 순례와 피정을 통한 에페소 성모님 성지 보존과 중동평화와 생태환경 보존을 지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