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자기가 누군지 묻는 사람들에게
서슴지 않고 답하고, 프란치스코도 이 면에서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육신의 아버지와 결별하며 이제부터 나는 하느님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라고
자유롭게 부를 수 있게 되었다고 선언한 뒤 길을 가던 중 강도로부터
너 누구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프란치스코도 서슴지 않고 답하였지요.
자기는 위대한 왕의 사신이라고.
아마 성인들은 다 서슴지 않고 이렇게 답할 수 있는 분들일 것입니다.
이런 성인들이 저는 오늘 부럽습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저는 부럽습니다.’라고 한 것은
전에는 안 그랬는데 오늘 부럽다는 느낌이 다분히 있지요.
그러니까 전엔 저도 제가 누군지 서슴지 않고 답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해 부끄러운 느낌이 없지 않지만
그렇다고 옛날의 제가 지금보다 낫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저는 지금 부끄러우면서도 부러운 것인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그런데도 지금이 더 마음 편합니다.
그것은 옛날의 제가 서슴지 않았던 것은, 성인들의 서슴지 않음과 같지 않고,
어떻게 보면 섣부른 자신감이었거나 교만한 자기 정체 의식이었고
지금의 제가 오히려 겸손한 자기 인식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예를 들어 옛날의 저는 ‘나는 프란치스칸이다.’라고 서슴지 않고 말했습니다.
망설이지 않았고,
그런 제가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저는 프란치스칸 정체성에서 의심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제가 프란치스칸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운 게 아닌 것은 아니지만
제가 그럴 자격이 있는가 하는 면에서 부끄럽고
그래서 지금은 서슴지 않을 수 없고 망설입니다.
서슴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모호함이 없고,
꿀리는 것이 없고,
켕기는 것이 없어야 하는데
저는 저의 정체성에 대해 모호함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뭔가 꿀리는 게 있고, 켕기는 게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저는 지금의 이런 제가 마음 편하다고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저의 편함의 한 자락은 이런 저에 안주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다른 한 자락은 겸손이 주는 편안함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까치발을 하고 서 있던 제가 바닥에 편안히 앉아 있는 것과 같고,
적어도 더 이상 까치발은 하고 있지 않은 그런 편안함일 것입니다.
지금의 저의 겸손은 저의 바닥을 보는 것이고,
더 나아가 그 바닥에 편안히 머무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 저의 편안함은 오늘 서간의 당부대로
하느님 안에 제가 편안히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떠나 여기저기 표류하지 않고,
하느님께 단단히 정박하고 있는 배와 같습니다.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을 기웃거리지도 않고,
주님의 가르침과 다른 이설들에 이리저리 현혹되지도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서간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적’에 현혹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편안함은 좋은 것이지만
편안함에의 안주는 나쁜 거지요.
그러니 하느님 안에 머문다고 하며 하느님께 나아가지 않는 안주와
특히 죄에의 안주를 경계해야겠다고 다시 한번 경각심을 갖는 오늘 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