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분께서 바로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
싸움의 고수는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싸워서 이기는 사람은 하수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에서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인지에
대해서 얘기하는데, 여기에도 이것이 똑같이 적용될까요?
예를 들어, 세상의 불의가 있는데 이 불의에 대해
우리 교회는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우리 신앙생활만 충실히 하면
그것이 싸우지 않고도 세상을 이기는 고수의 방법일까요?
오늘 독서도 이와 비슷한 뜻으로 얘기하는 것 같은데 그런 건가요?
이런 뜻이라면 일제 강점기 우리 한국 교회가 취한 태도와 비슷하고,
지금도 세상의 불의에 대해 침묵하라고 하는 많은 신자의 주장과 같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 교회는 일제의 억압과 만행에 침묵했을 뿐 아니라
동양 평화를 외치며 이등박문을 암살한 안중근 의사에게 성사조차 불허했는데
이것은 일제에 의해 교회가 폐쇄되는 것을 막기 위해 불의에 침묵한 것이지요.
우리나라가 해방되고 독재정권이 들어섰을 때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고,
교회는 정치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며 침묵할 것을 독재정권은 강요했고,
일부 신자도 같은 논리로 사회 문제나 불의에 교회가 침묵해야 한다고 했지요.
그런데 우리가 꼭 알아야 하고 잘 알아야 할 것은,
교회가 사회 문제에 정치적으로 개입하면 안 되는 것이지
복음적으로 증거하고 싸우는 것까지 안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주님도 세상과 싸우지 않으신 분이 아닙니다.
세상의 불의와 싸우지 않는다면
그것은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세상을 진정 사랑한다면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해 싸웁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는 말이 바로 그 뜻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시고,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는 겁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은, 예수는 메시아라는 것이요,
메시아라는 것은, 세상을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것이고,
세상을 구원한다는 것은, 세상의 죄를 없애는 것이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다만 그 방법이 둘입니다.
물의 방법과 피의 방법입니다.
박해시대 때 피를 흘려 신앙을 증거 하는 것과
복음적인 삶으로 신앙을 증거 하는 것 두 가지 방식이 있었듯이
말과 행위로 그러니까 삶으로 불의를 고발하고 정의를 구현하는 물의 방법과,
어린 양처럼 피 흘리고 죽음으로 세상의 죄를 없애는 피의 방법 두 가지입니다.
간디가 불의와 싸우지 않은 것이 아니고, 다만 비폭력적으로 싸운 것뿐이듯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사랑하셨기에 싸우셨고, 사랑으로 싸우셨습니다.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셨기에 이 세상에 내려오셨고,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세상의 죄와 싸우셨습니다.
우리도 개인의 죄든 세상의 죄든, 비겁하게 못 본 척하지 말고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싸우되 감정적 폭력이든 물리적 폭력이든 폭력적으로 싸우지 말고,
이념적 정치적으로 싸우지 말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싸우면 됩니다.
사랑 때문에 싸우고
사랑으로 싸우는 것이 최고수의 싸움임을 한 수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