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이스라엘의 선민주의적인 냄새가 나는 글을 보기만하면
저는 예민해지고 거의 신경질적인 거부반응을 보입니다.
이 말씀도 그런 냄새가 나서 즉각 거부반응을 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가까이 계셔주시는가?
절대로, 절대로 그렇지 않으시지요.
하느님은 공기처럼 가깝고 햇빛처럼 공평하십니다.
숨을 쉬기만 하면 들이킬 수 있을 정도로 공기는 코 가까이에 있고,
주님 말씀처럼 햇빛은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춥니다.
그러나 가까이 있는 공기도 숨을 쉬는 사람이 들이키고,
공평한 햇빛도 양지로 나온 사람이라야 쬐게 되잖습니까?
그러니 얼마 전에 작고한 제가 아는 그분처럼 폐가 완전히 망가져
호흡기에 의지해야 하는 사람은 가까이 있는 공기도 들이키지 못하고
늘 컴퓨터 게임에 빠져 방구석에 처박혀있는 사람은 햇빛을 쬐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위대한 민족은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이스라엘 족속처럼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신다고 믿는 족속이며
주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하늘나라의 그 큰 사람은
가까이 계셔주시는 분께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법보다 주먹이 가깝고,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사람이 있듯이
하느님이 그렇게 가까이 계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가까이 다가가기는커녕 오히려 하느님께로부터 도망을 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주먹을 휘두르는 무서운 분이 아니라
법을 주시는 분으로 이해하는 사람이라야 가까이 다가갈 것이고,
당신 법을 지키지 않으면 주먹이 먼저 나가는 분이 아니라
그 법을 자상하게 가르쳐주시는 분으로 이해하는 사람이라야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갈 것입니다.
제가 수도원에 처음 들어왔을 때 호랑이 수사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다들 무서워 그분 가까이 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분이 무섭지 않고 야단을 맞아도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랬더니 그 무서운 분이 다정한 분으로 저에게 다가오셨습니다.
당신 운동 상대로 저를 삼으셨고 시장 갈 땐 저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을 제가 무서워하지 않은 이유는
그분의 야단이 제게는 고마웠기 때문이고
야단치는 그분이 제게는 아버지 같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가 두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아버지가 늘 그리웠고,
그래서 친구들은 아버지가 무섭다고 슬슬 피하는데
저는 오히려 그런 친구들을 부러워하였지요.
그러니 애비 없는 후레자식 소리 듣지 않으려고
늘 스스로 제 행위의 잣대를 가지고 살던 저에게
그분의 야단과 잔소리는 제 삶을 올바로 인도하는 고마운 법도였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법이 아니라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싫지만 억지로 지키는 게 아니라 고마워서 지키는 사람,
이런 사람이 오늘 독서에서 말하는 위대한 족속이고,
주님이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큰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늘 엄하시고 무서웠지만 조금씩 두려움에서
깨우침으로 바꾸어주심 깊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