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평화
어느날 대전 목동 수련소에서 거름을 만들기 위해 분쇄기에다 나무를 넣고 거름을 만들고 있었다. 분쇄할 때의
소리가 꽤 크다. 처음 사용할 때에는 적응이 안되서 자연스럽지 못했지만 이제는 그렇게 힘겹지 않게 할 수 있다.
언젠가 나무를 파쇄시키다가 기계사이사이에 끼여 있는 찌꺼기를 없애기 위해 기계를 멈췄다. 그 순간 정체를 알
수 없는 예쁜 새 한마리가 기계 바로 앞에 앉아서 지저귀기 시작했다. 짝을 찾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암튼 한
동안 지저궜다.
그런데 그 새가 지저귀는 동안에는 다른새가 지저귀는 것과는 좀 다르게 더 귀에 들어오고, 그 예쁜 소리가 내 마
음에 들어온다는 것을 난 느낄 수 있었다. 다른날에도 여기저기서 수 없이 새소리를 들었지만 내 마음이 이와같지
않았는데, 오늘 따라 왜 그런것일까? 난 일하면서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생각해 본 결과 그 이유는 바로 그 새가 특
별한 새라서 특별하게 다른새들과는 달리 예쁘게 지저귀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전에 있었던 시끄러운 소음이 있었
던 작업 환경 때문이었다는 것을 난 알게 되었다.
평범한날의 새소리와 시끄러운 소음뒤의 새소리,, 새소리와 새소리 그것은 같은 새소리였지만 그날은 분명 다른
소리로 나에게 다가왔었다. 새소리와 새소리를 통해서 한번 되새겨 본다. 평화스러운 일상 속에서의 평화는 그 평
화의 좋음을 느끼고, 그 평화가 주는 행복과 고요함을 깨닫지가 못할 때가 있다. 그러나 전쟁과 시련과 수 없는 어
려움 뒤의 평화는 누구나 느끼는 바이지만 그 고요함과 평화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 몸으로 느낄 수가 있
는 것이다.
새소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평범한 날의 새소리는 그냥 새소리일 뿐이고, 새가 지저귀는 소리일 뿐이지만, 시
끄러운 소음뒤에 그 소음을 견디고 난 뒤의 찾아오는 새소리의 고요함은 단지 새소리일뿐만 아니라 나에게 찾아온
그 어떤 하나의 행복으로 찾아오기 마련이다. 이것 역시 하나의 진리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 어려움 없이 이
집트에서 살다가 쉽게쉽게 편하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게 되었다면 그들은 너무나도 쉽게 하느님께에 대한 신
앙을 저버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소중함을 신앙의 소중함을 믿음의 소중함을 몰랐었을 수도 있었기 때문
이다.
하지만 그들은 온갖 어려움 속에서 하느님을 찾았기에 하느님과 그분께에 대한 신앙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진리이신 예수님께서도 이를 삶으로 보여 주셨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힘겨운 공생활과 뼈를 깍는 듯한 수
난의 고통없이 부활 하셨다면 지금과 같이 부활이라는 신앙이 우리에게 큰 의미로 와 닿지 않았을 것이다. 부활이
라고 하는 찬란한 영광 뒤에는 처참한 수난과 죽음이 있었기에 부활이라는 그리스도의 영광 또한 그만큼 빛나는
것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어려움이 있다.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도, 수도생활을 하는 사람도, 그리고 그
어려움은 우리에게 진정 소중하고 가치있는 것을 하찮게 여기지 않도록, 소중한것을 소중하게 여기고, 가치있는
것을 가치있게 여기게 하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선물일 것이다. 성경에서는 말하고 있다. " 여
러분은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시면서 내리시는 권고를 잊어 버렸습니다. '내 아들아, 주님의 훈육을 하
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더라도 낙심하지 마라. 주님께서는 자녀로 여기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여기시는 모든이들을 채찍질 하신다'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뎌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
로 대하십니다".(히브리서 12,5-7)
일상안에서 들려온 평범한 날에 들렸던 새소리가 그냥 새소리로 들려왔었지만, 시끄러운 소음뒤의 새소리는 나
에게 자그마한 행복과하느님의 지혜와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의 진리, 또한 내 삶의 가르침으로 다가왔다. 그러
나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끄러운 삶을 애써 피하려고 하지 않는가?
새 소리 단지 새소리 아닌
고요와 평화로움 주시는 하느님의 음성 행복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