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독서는 창세기의 시작으로 하느님의 창조를 얘기합니다.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많은 병자를 고쳐 주시는 얘기인데
그 결과는 단지 치유에 그치지 않고 구원까지 발생합니다.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그러니 오늘 독서와 복음을 합치면 <창조와 구원의 하느님>이십니다.
이런 주제를 묵상하니 자연 <연중시기 공통 감사송 3>이 떠오릅니다.
“아버지께서는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통하여 인류를 창조하셨듯이
또한 인자로이 인류를 구원하셨나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인류를 구원하시는 것은
창조와 구원 사이에 인간이 비 구원 상태에 있었음을 전제하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창조가 잘못되지 않았다면 구원할 필요가 없겠지요.
예를 들어 아이를 낳았는데 정상적인 아이를 낳았다면 치유가 필요 없듯이.
그런데 낳기는 정상적으로 낳았는데 아이가 크게 다치거나 불치병이 들면
치유가 필요하듯 하느님의 창조는 정상적이었는데 인류가 육체적, 심리적,
정신적, 영적으로 병이 들었다면 치유가 필요하고,
그중에서도 영적으로 병들었다면, 곧 죄를 지었다면 구원이 필요하겠지요.
그런데 오늘 창세기는 하느님의 창조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원하시는 대로 잘 되었고 그래서 보시기에 좋았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잘 창조된 인류와 피조물이 인간의 죄로 비 구원 상태에 놓이고,
비 구원 상태에 있는 인류와 세상 구원을 위해 파견된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노래하며 감사하는 것이 <연중시기 공통 감사송 3>입니다.
저는 이 감사 기도를 바칠 때마다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느님 사랑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느님 사랑을 느낍니다.
우리 인간의 포기하는 사랑과 비교하면서 말입니다.
우리 인간 가운데는 애를 낳고는 내버리는 사람도 있잖습니까?
며칠 전 아이를 팽개치고 놀던 엄마 때문에 아이가 굶어 죽은 사건이 있었고,
그런 뉴스가 요즘 심심치 않게 올라오는데 하느님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은 또 죄지은 사람을 몇 번 사랑으로 충고하고는 말을 듣지 않으면
사랑을 포기하여 구원을 포기하는 데 비해
하느님의 사랑은 결코, 그렇지 않고 끝까지 구원하시지요.
그러므로 오늘 창세기에서는
말씀하신 대로 “그대로 되었다.”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복음에서는 환자들을 예수께 데려오려고 이리저리 분주히 움직이는
이웃의 사랑을 마음에 같이 간직하는 오늘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