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롭게도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열리다’는 말이 같이 나옵니다.
창세기에는 아담과 하와의 눈이 열릴 것이라는 뱀의 유혹이 나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복음은 주님께서 귀먹고 말을 더듬는 이의 귀와 혀를 열어주시는 얘기입니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 두 ‘열림’을 보고 즉시 정반대의 열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경우는 열리지 말아야 할 죄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고,
복음에서 장애인의 경우는 열려야 할 은총의 세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정반대의 열림이 있게 된 것은,
정반대의 요인 때문임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뱀 곧 사탄의 유혹과 주님의 구원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아담과 하와는 유혹을 받고 복음의 장애인은 구원을 받습니까?
그것은 아담과 하와에게는 욕망이 있었고
복음의 장애인에게는 갈망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오늘 창세기에는 욕망이라는 얘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나무 열매가 탐스러웠다는 말에서 탐욕을 유추할 수 있고
그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압니다. 욕망이 없으면 유혹도 없다는 것을.
사실 배가 불러 식욕이 전혀 없으면 음식 냄새는 결코, 유혹이 되지 않고,
내 아내를 너무도 사랑하면 어떤 여자의 유혹도 유혹이 되지 않지요.
그러니 욕망이란 결핍을 채워 더 만족하게 되고
완전한 만족을 얻게 되기를 바라는 것인데
이것으로 만족할 줄 모르는 자의 배부른 결핍이지요.
아담과 하와는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 열매 외에는 다 따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 외에는 다 가질 수 있었고 가지고 있었습니다.
딱 하나 못 가진 것이 있었고 그러나 평소에는 쳐다보지 않았는데
뱀이 그것을 가리켜 보게 하자 그만 유혹에 넘어가 버린 것입니다.
쳐다보지 않았으면 되는데 쳐다보는 바람에 그리된 것이지요.
홈 쇼핑을 보지 않으면 되는데 보는 바람에 충동 구매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밖에서 사탄이 보라고 해도 보지 않으면 되는데
안에 욕망이 있으면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많이 가지고 있어도 못 가진 것을 보게 하는 것이 욕망이고,
이때 못 가졌다고 느끼는 결핍이 바로 욕망의 결핍입니다.
이런 욕망의 결핍과 반대되는 것이 갈망의 결핍입니다.
욕망은 있는데도 더 바라기에 결핍을 느끼는 것이지만
갈망은 정말 없고 그래서 생존 또는 존립에 결핍이 있는 것입니다.
적절한 예가 될는지 모르지만
욕망은 이미 많이 먹었는데도 더 맛있는 것을 탐하는 것이라면
갈망은 며칠을 한 끼도 먹지 못해 정말 죽 한 그릇이라도 먹고 싶은 겁니다.
갈망은 살기 위한 것이고,
욕망은 만족을 위한 것이며 그것도 끝없는 만족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갈망은 살기를 바람으로써 구원을 받게 하고
욕망은 더 큰 만족을 바람으로써 유혹을 받게 하며,
갈망은 구원자를 만나 은총의 세계에 들게 하고
욕망은 사탄을 만나 죄의 세계에 들게 하는 것이다.
구원과 만족 중에 무엇을 바랄 것인가?
갈망과 욕망 중에 무엇을 가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