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시는 것을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단어이다보니
알아듣지 못한 것을
여쭈어보지도 못합니다.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되지만
죽음 예고가 있은 다음에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제자들은 서열 문제로 다투고 있습니다.
꼭 부모의 죽음 앞에서
유산 문제로 다투는 자녀들 모습 처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매우 답답하지 않으셨을까
생각됩니다.
부활에 대한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이 생각했을 때
예수님 같은 위대한 분이
다른 사람들 손에 죽게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고
그래서 그렇게 되길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했다기 보다는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는 모습이
한편으로는 철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 철없는 모습을
예수님께서는 꾸짖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는 것 같습니다.
제자들에게
어린이를 당신 이름으로 받아들이라고
하신 말씀이,
당신께서는 제자들의 철없는 모습을
이미 받아들이셨다는 말씀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공관복음에는 세 번의 수난 예고가 나옵니다.
그 가운데 오늘은 두 번째입니다.
세 번 모두 제자들은
그 뜻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 뜻을 알아듣지 못한 제자들은
스승님의 죽음 순간에
스승님 곁을 지키지 못하고
도망가게 됩니다.
첫 번째 수난 예고에서는
베드로를 꾸짖기도 하시지만
한결같은 철없는 모습을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꾸짖지 않으시고
인간의 모습으로 인정해 주시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움으로 다급해 하시기 보다는
인내로 기다려 주십니다.
그리고 그 인내는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해서
열매를 맺게 됩니다.
기다려 주시는 하느님,
더욱이 인간의 힘만으로는 쉽지 않기에
당신의 은총까지 내려 주시는 하느님,
그 인내를 볼 수 있고
그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