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독서의 요셉은 예수님의 예표입니다.
집 짓는 자들이 내 버렸지만, 하느님께서 모퉁이 돌로 삼으신 돌입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그런데 여기서 내 버렸다는 것은 필요 없으니까 버린 그 정도가 아닙니다.
제거라는 표현이 맞고 정적을 죽이듯이 죽여버렸다는 표현이 맞을 겁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반드시 죽여야겠다고 마음먹는 사람들이 하는 짓입니다.
저로서는 생각이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짓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파리도 함부로 죽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저나 여러분이
누굴 죽이겠다는 생각은 꿈에도 없고 생각 넘어 마음먹고
마음먹은 것을 실행하고 그것도 같이 모의하여
단체로 실행하는 것은 더더욱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모든 선의 파괴와 모든 생명의 파괴는 악입니다.
물론 자연 순환적인 죽음은 파괴가 아니라 생산이기에
여기서는 악심에 의한 파괴를 말함인데 이들의 악심은 아주 대단합니다.
근현대사의 히틀러나 일본 제국주의자들처럼,
그리고 가깝게는 우리나라나 미얀마에서 학살을 저지른 군부 독재자들처럼,
눈 깜짝하지 않고 그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그들의 악심은 대단합니다.
그래서 신앙을 가진 우리, 다시 말해서 하느님을 믿는 우리는,
이런 자들에 대해 하느님은 어떻게 하실지 궁금합니다.
집 짓는 자들이 버린 돌, 모퉁이 돌로 삼으시는 주님은
죽게 된 요셉을 형제들로부터 구출해내시듯,
죽게 된 사람을 악심을 품은 자들에게서 구출해내시는 분일 뿐입니까?
그런데 창세기의 요셉 얘기는 악심을 품은 자들에게서 요셉을 구하시고,
그 요셉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하시는 얘기로 끝나지만
복음의 주님은 악심을 품은 자들을 하느님께서 반드시 징벌하신다고 얘기합니다.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이다.”
어제 가난한 라자로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고 회개 없이 죽은 것만으로도
부자를 천국 명부에서 이름을 빼시고 지옥행의 벌을 내리신 하느님께서
힘없는 사람들을 모의하여 죽이는 이 회개 없는 작당을 그대로 두실 리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너그럽고 자비로우신 것만이 아니고,
악한 자에게 약한 사랑이 결코 아닙니다.
약한 사람에게 너그럽고 자비로우시지만
악한 사람에게는 엄하고 강하시며,
회개를 요구하시고 벌도 내리시는데
그것이 이들에게 걸맞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약하다고 해서 악하지 않을까요?
약하기에 큰 악은 못 저지르고 작은 악을 저지르겠지요?
하느님께서는 작은 악에 대해서도 회개를 요구하십니다.
하느님은 크든 작든 악에 대해서는 회개를 끝까지 요구하시는 분입니다.
다만 작은 악이기에 회개하는 것이 덜 어려울지 어쩌면 더 어려울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