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탈출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목말라 죽겠다고,
그러니 물을 달라고 모세에게 또다시 들이댑니다.
들이대는 것만 놓고 생각하면 참 못된 족속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영적으로 바꿔 생각하면 목마른 것을 모세에게 호소하고
물을 달라고 하니 다행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물이 나올 수 없는 사막에서 자기 힘으로 우물을 파고 물을 구하려 하지 않고,
또는 다른 누구에게 물을 달라고 하지 않고 모세에게 달라고 하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막은 물이 없는 곳이고,
사막에서는 목이 마르기 마련인데 우리 인생이 바로 사막의 인생입니다.
우리 인생이 이런 줄 알고 그래서 목마를 때 모세에게 물을 청하면 다행인데
복음의 사마리아 여인은 목말라 하지 않고 예수님께 물을 청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복음의 사마리아 여인과 비교하여 모세의 백성들은 영적 양반이 아닙니까?
그러니 우리도 영적인 목마름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아가거나
목마른데도 참거나 고상한 척하지 말고 모세의 백성처럼 들이대는 것이 낫습니다.
오늘 사순 제3주일은 우리 인간은 목마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주님께 물을 달라고 청하면 하느님께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물을 주신다는 것,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는 다른 누가 아닌 주님이 주신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물을 달라는 백성 앞에서 모세에게 바위를 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바위입니까? 그 바위가 암반수이기 때문입니까?
그것은 물이 나올 수 없는 바위에서도 물을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라는 얘기를 하기 위함이지요.
탈출기가 이것을 가르친다면 복음은 주님이 주시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이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탈출기가 물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란 것을 가르친다면
복음은 하느님이 주시는 물은 야곱의 우물물과 다름을 가르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야곱의 물을 마셨기에 다섯 남자로도 갈증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다섯 남자의 사랑을 합쳐도 하느님 사랑보다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백 남자의 사랑을 합쳐도 하느님 사랑보다 못합니다.
그리고 사랑의 갈증은 인간의 사랑으로 채울 수 없을 뿐 아니라
인간의 사랑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사실 이 세상에서 연명케 하는 사랑이지
저세상까지 살 수 있게 하는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만이 저세상을 사랑하게 하는 사랑이고,
그래서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니 사순 제3주일에 이런 가르침을 받는 우리는
이 세상을 사랑하게 하는 사람의 사랑이 아니라
저세상을 사랑하게 하는 주님의 사랑을 갈망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