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시고,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나는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월요일부터 성주간 독서는 이사야서 ‘주님의 종’의 노래가 이어지는데
오늘은 세 번째 노래로서 제자의 귀와 혀에 관해 얘기합니다.
제자의 혀란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아는 혀인데
하느님께서 그런 혀를 주신다고 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자의 귀에 관한 얘기는 이해하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제자의 귀를 가진 사람은 거역하거나 뒤로 물러서지 않으며
모욕과 수치를 당하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는다는 말이나
더 나아가 수치나 모욕을 당하지 않는다는 말은 설명이 필요할 것입니다.
제자의 귀를 가지면 어찌 거역하지 않고,
어찌 수치나 모욕을 당하지 않는 겁니까?
즉시 떠오르는 말이 귀가 순하다는 뜻으로 공자가 가르친 이순(耳順)입니다.
귀가 순하다는 것은 귀에 거슬리는 말도 거역치 않고 순히 듣는다는 뜻일 겁니다.
오늘 이사야서가 거역하거나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고 한 말과 같은 뜻이겠고요.
물론 아무 말이나 순히 듣는 것이 아닐 것이고,
주님의 말씀만 순히 듣는다는 뜻이겠고,
주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들으려면
어떤 고통도 마다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물론 이것 절대 쉬운 것이 아닌데 그래도 하느님께서 귀를 일깨우시면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고 이해도 되지만,
그다음 단계 곧 모욕과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난해합니다.
주님께서 도와주시면 정말 모욕과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까?
모욕과 수치를 주는 사람을 주님께서 없애주시기 때문입니까?
그런데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다.”라고 하는 것을 보면
그런 자를 주님께서 없애주신 것이 아니고, 그들에게 내맡긴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도와주시길래 모욕과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겁니까?
사랑하면 모욕과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다.
남편과 일찍 사별하고 이제 어떻게든 자식 먹여 살려야 하는 엄마는
곱던 얼굴이 망가질 정도로 시장에서 장사해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강아지 소리 들으며 딸 고쳐주려던 이방 여인도 수치 당하지 않았지요.
사랑하면 나의 시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 있기에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당하는 모욕과 수치에 개의치 않습니다.
나는 사랑을 한 것이고 사랑으로 한 것이지 모욕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프란치스코는 동냥에 대해 얘기할 때 오늘 이사야서를 인용합니다.
그도 처음 동냥하러 다닐 때는 부끄러워했는데 극복한 다음 이렇게 권고합니다.
“형제들은 부끄러워 말고, 오히려 주님께서 ‘차돌처럼 당신 얼굴빛 변치 않으셨고’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욕을 줄 때,
그 받은 모욕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큰 영예를 받게 될 것이니,
그 일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모욕은,
모욕을 받는 사람의 탓이 아니라 주는 사람의 탓이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시선이 모욕하는 사람에게 가 있지 않고, 주님께 가 있는 것이며
사랑하는 주님이 옆에 계시면 부끄러울 것도 모욕당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관건은 역시 사랑이고 사랑이 없는 사람이 모욕당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