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성소 주일을 맞아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시면 나는 좋아할까 생각해봤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부르면 좋아하지 않거나 겁을 냅니다.
제가 부르면 늘 일을 시키기 때문이지요.
이런 생각 다음 누가 부르면 좋아할까도 생각해봤습니다.
깡패가 부르면 당연히 싫어하겠지만
예를 들어 애인이 부르는 것과 어머니가 부르는 것과,
주님이 부르는 것 가운데서 어떤 것이 좋아할까 말입니다.
지난주 수녀님들 피정을 동반할 때 “공동생활”이 주제였는데
피정의 집 동산에 꽃이 만발했기에 다음과 같은 묵상 거리를 드렸습니다.
꽃을 보면 그 아름다움을 같이 보고 싶은 존재가 있는가? 아무도 없는가?
같이 보고 싶은 존재가 있다면 그것이 누구인가?
같이 사는 자매인가? 밖에 사는 누구인가?
아무튼, 이때 떠오르는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 것과 마찬가지로
엄마나 애인이 부르는 것보다, 주님이 부르는 것이 좋으면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그 반대이겠지요.
그래서 다시 생각해봤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왜 부르시고, 우리는 주님과 어떤 관계인가?
주인과 종의 관계인가? 아니면 목자와 양의 관계인가?
주인과 종의 관계라면 주님께서 일을 시키려 부르실 것이고,
목자와 양의 관계라면 우리를 당신 사랑으로 충만케 하시려 부르실 겁니다.
그런데 우리와 주님 관계가 그 어떤 것 하나인지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지요.
주님과 우리 관계는 목자와 양의 관계, 주인과 종의 관계 둘 다이기 때문이지요.
우리에게는 이런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먹이지도 않고 일을 부려 먹는 분이 아니라는.
주님께서는 우리를 당신 사랑으로 충만케 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라거나 복음을 전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먼저 당신에게로 부르시고 당신 사랑으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나만 부르지 않으시고 열두 사도를 같이 부르시고,
목자가 한 마리 양이 아니라 양 떼를 부르시듯 같이 부르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성찰케 됩니다.
주님께서 부르실 때 나는 혼자 가고 싶은가? 누구와 같이 가고 싶은가?
가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누구인가? 지금 같이 사는 사람인가? 다른 누구인가?
부부라면 지금 주님께로 같이 가는 동반자인가?
아직도 서로를 향할 뿐 주님께 같이 가지 않는 관계인가?
자식들은 어떤가? 같이 주님을 향하는가? 서로를 향하는 관계인가?
수도자라면 나는 혼자 주님께 가도록 부르심 받은 독수자인가?
같이 주님께 가도록 함께 부르심 받은 공동체 수도자들인가?
다음으로 우리는 소명을 받드는 주님의 일꾼들이라는 것을 보겠습니다.
소명이라는 말 자체가 성소적인 표현입니다.
소명의 소자와 성소의 소자가 부르심이라는 같은 뜻이고,
명령을 받들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뜻이요,
부르심을 받아 명령을 받드는 것을 뜻합니다.
아무튼, 우리는 주님의 종이요 일꾼들이고 소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설마 일꾼은 싫고 사랑만 받겠다는 얌체나 어린아이는 아니겠지요?
일을 시킬까 봐 주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것을 살살 피하는 나는 아니겠지요?
이것을 돌아보게 되는 오늘 성소주일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성소자가 많기를 기도하는 오늘 성소주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