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5주 화요일-2021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이 말씀은 제가 장례 미사를 주례할 때 자주 하는 말입니다.
고인은 유족을 떠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간 것이고,
그렇기에 유족은 고인을 위해서 슬퍼할 것 없다는 얘기지요.
지난주에는 저의 제자가 죽은 지 50일 되는 미사를 봉헌했는데
그때도 같은 취지로 미사에 참석한 남편에게 얘기했지요.
제가 그렇게 말했지만, 입관 예절할 때 정작 저는 그의 얼굴을 보고
터진 울음을 멈출 수가 없어서 하염없이 울며 미사를 봉헌했는데
그것은 그의 일생을 생각하니 너무 서러웠기 때문이었지요.
그렇습니다.
그의 이 세상 삶은 너무 고통스럽고 너무 서러운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기에 이 세상 삶을 끝내는 것은 고통을 끝내는 것이고,
장례 미사 때 자주 듣게 되는 것처럼 이제 다시는
죽음도 슬픔도 울부짖음도 없게 되는 것이니 오히려 잘된 것이었지요.
그래서 생전 잘못해준 것 때문에 괴로워하는 그의 남편에게도
너무 죄책감 느끼지 말라고, 이제 고통이 끝났으니 잘된 거라고 얘기했지요.
그러나 고통이 끝난 것보다 더 잘된 것은 하느님께로 간 것이지요.
저의 제자도 아직 아이들이 다 크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그 고통에도 불구하고 더 살고 싶어 했지만, 더 버틸 수 없게 되자
마지막에는 죽음을 잘 받아들이고 마무리도 잘하고 떠났는데 분명
하느님께로 간다는 믿음을 가지고 평안하게 세상을 떠났을 겁니다.
그러므로 내가 태어난 것이 단백질의 합성 작용으로 태어났거나
육신의 아비와 어미로부터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태어났다고 분명히 믿는 우리라면 우리도 주님처럼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라는 믿음도 확고할 것입니다.
이 세상을 떠나는 분들, 그중에서도 신앙인들은 분명 그럴 겁니다.
문제는 남아있는 사람들, 곧 우리인데 슬픔, 후회감, 죄책감,
허무감이 들고, 심지어 절망감까지 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하고 그런 것이 없기를 바라면 안 됩니다.
그것이 없거나 없기를 바란다면 나쁜 놈이고 사랑치 않는다는 표시이니
그를 사랑한다면 그런 고통이 있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이런 고통은 내가 감내해야 할 몫이고
오늘 주님께서 당신이 아버지께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고
하신 말씀에는 이런 뜻도 있을 것입니다.
감내하는 고통과 몸부림치는 고통이 다르고,
평화로운 고통과 심란한 고통이 다릅니다.
감내하는 고통은 고통이 마음 한편에 있어도 마음 산란하지 않고,
어떤 면에서는 마음에 평화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옷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지 않고
옷장에 잘 개켜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부정적인 감정이 마음대로 날뛰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그런 감정에 내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사랑이 고통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께서 평화를 주고 가신다는 것은 이런 뜻만이 아닙니다.
다시 오신다고 하셨으니 버려두고 가시는 것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고
당신은 가고 평화만 남겨두시겠다는 것도 아니고
당신의 평화, 곧 당신도 함께 계시는 평화를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당신이 떠나도 우리와 함께 계셔 주시는 분이 바로 주님의 성령입니다.
그것은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남긴 그 영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평화를 주시겠다고 하기 전에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하신
그 뜻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하고, 그것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