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바르티매오의 얘기로서 너무 감동적입니다.
그는 본래 보던 사람이었는데 볼 수 없게 되었다가
보고 싶은 열망 때문에 자비를 열렬히 주님께 청하였고
그래서 주님께 자비를 입은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입 다물라고 했는데도 그것에 굴하지 않고,
더 큰 소리로 자비를 청하는 그 자비 열망이 너무 감동적이고
그래서 자비를 입은 것이 본받을 만합니다.
그러나 더 감동적인 것은 자비를 입고 난 뒤
그것으로 ‘땡’하지 않고 주님을 따라나선 것입니다.
자기 눈이 멀쩡해지고 불편함이 없어진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눈으로 주님을 보고 주님을 따라나서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복음 묵상은 이 정도로 나누고 집회서 묵상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집회서는 너무 장대하고 그래서 우리 인생과 신앙을 넓게 성찰케 합니다.
우선 첫 말씀이 우리 인생과 신앙을 성찰케 하고 반성케 합니다.
“나는 이제 주님의 업적을 기억하고 내가 본 것을 묘사하리라.”
우리는 나의 업적을 기억하고 그것을 대단한 것인 양 장광설을 펼치는데
집회서 저자는 주님의 업적을 기억하고 묘사하겠다고 합니다.
사실 주님의 업적 앞에 우리가 있다면 우리 업적은 업적도 아니잖습니까?
다음 말씀은 “주님의 업적은 그분의 말씀으로 이루어졌고,
그분의 결정은 선의에서 나왔다.”입니다.
우리의 업적이라는 것이 보잘것없지만
그 보잘것없는 업적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갖은 애를 쓰는데
주님은 당신 말씀으로 그것도 한 말씀으로 당신 업적을 이루십니다.
백인대장은 자기 종의 치유를 부탁하면서 주님 친히 자기 집에 오실 필요 없고,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종이 낫겠나이다 하였는데 이렇듯이 주님은
한 말씀으로 모든 걸 이루시지만 우리는 갖은 애를 써도 업적이랄 것이 못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결정은 악의에서 나오기 십상이고,
선의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불순물처럼 있기 십상입니다.
온전히 순수한 사랑에서 비롯된 선의가 아닐 때
위선이나 자기 성취나 만족과 같은 불순물이 선의에 섞여 있기 마련이지요.
이어서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깊은 바다와 사람의 마음까지 헤아리시고 그 술책을 꿰뚫어 보신다.
사실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는 온갖 통찰력을 갖추시고 시대의 표징을 살피신다.
어떤 생각도 그분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분 앞에는 말 한마디도 숨길 수 없다.”
우리는 어떤 인간을 일컬어 통찰력이 있다고 하고,
저도 성향상 다른 사람에 비해 직관이나 통찰력이 있는 편이라고 얘기되는데
그렇다고 한들 하느님께 비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겸손하면 할수록 그리고 하느님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그분을 다 알지 못하는데
그분은 우리를 속속들이 다 알고 모든 것을 다 아신다고,
그래서 우리의 어떤 생각도 그분을 벗어날 수 없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말씀이 마음에 많이 와닿습니다.
“만물은 서로 마주하여 짝을 이루고 있으니 그분께서는 어느 것도
불완전하게 만들지 않으셨다. 하나는 다른 하나의 좋은 점을 돋보이게 한다.”
하느님은 이러하도록 우리 인간을 만드셨는데,
곧 혼자 있는 것이 보기에 좋지 않아 짝을 이루도록 우리 인간을 만드셨고,
혼자서 완전하지 않고 합하여 완전하도록 만드셨는데, 우리는 종종
마주하는 것은 불편하다, 혼자 있는 것이 편타 하고 혼자서 완전해지려고 합니다.
그리고 서로 좋은 점을 돋보이게 하는 것으로 우리 인간을 만드셨는데
서로 돋보이게 하지 않고, 자기가 돋보이고, 자기만 돋보이려고 하거나
다른 사람으로 인해 열등감을 느끼곤 하기에 서로를 망가트립니다.
그러니 이제 누굴 만나든 둘이서 완전해지는 짝으로 마주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