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의 강론을 오늘 돌아보니 아쉬움이 남습니다.
저는 어제 토빗을 완성형 인간으로 그리고
참되고 완전한 선행의 본보기와 행복한 선행의 본보기로 제시했는데
그것은 요지부동의 선행과 요지부동의 행복이었지요.
요지부동搖之不動이란 흔들어대도 부동 곧 끄떡없음을 말함이지요.
이것은 안빈낙도安貧樂道처럼 수행을 통해 도사 또는 완전의 경지에
올라 아무리 누가 흔들어대도 그 사랑과 행복이 끄떡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돌아보니 거기에 하느님이 빠져있었습니다.
이는 하느님이 필요 없는 초인으로 제가 토빗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토빗은 하느님이 필요 없는 초인이 아닙니다
인간의 모욕에 크게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이고,
하느님께 울며 탄식하는 사람입니다.
선행의 대가가 이런 거라면 죽는 것보다 못하다고 탄식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탄식이 독백이 아니라는 점이고
탄식이 향하는 곳도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라는 점입니다.
이 인간에게 모욕당하고 저 인간에게 하소연하는 식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탄식하고 그래서 탄식이 기도가 되는 그런 식입니다.
"그 무렵 나 토빗은 마음이 몹시 괴로워 탄식하며 울었다.
그리고 탄식 속에서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일곱 형제와 살다가 죽은 여인이 저세상에서는
누구의 부인이 될 것인지 사두가이들이 묻고 주님께서 답하시는 얘기가 나오는데
여기서 주님은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의 천사와 같을 것이다”라고 답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토빗기와 주님의 대답을 연결하여 묵상하니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초인이 되는 것을 선택할 것인가?
천사가 되는 것을 선택할 것인가?
우리 인간이 죽은 다음에도
여전히 인간으로 살지는 않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관계의 재편이 저세상에서는 있게 되고,
완전히 하느님 중심의 관계로 재편될 것이며,
그래서 다시 인간이 된다고 하더라도 천사와 같은 인간이 될 것입니다.
그것을 저는 지금부터 살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서 초인으로 살지 않고,
이 세상에서부터 천사와 같은 삶을 살고 싶습니다.
하느님이 필요 없는 초인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무는 천사처럼,
탄식이 기도가 되는 천사처럼 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