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5주일 독서와 복음은 하느님 말씀과
그 말씀을 듣는 사람의 관계에 관한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서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은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고 하는데,
복음에서는 그 하느님 말씀이 땅에 따라 풍성히 열매 맺기도 하지만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도 있음을 비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이사야서 말씀과 복음 말씀은 서로 모순되는 셈입니다.
하느님 말씀은 당신 뜻을 다 이루신다는 말씀과
아무리 하느님 말이어도 우리 마음 밭이 나쁘면 열매 맺지 못한다는 말씀이
서로 모순을 이루는 셈인데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모순을 느끼기보다 사랑을 느낌이 좋을 것입니다.
‘반드시’라는 말에서는 사랑의 의지를 느끼고
길이나 돌밭이나 가시덤불에도 떨어졌다는 비유에서는
인간을 가리지 않고 아낌없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는 것입니다.
저라면 내 말이 헛된 말이 되지 않게 하려고
내 말을 알아들을 사람과 듣고는 내 말대로 실천할 사람에게만 말을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입만 아플 것이기에 그런 사람에게는 아예 입을 다물 것입니다.
그런데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에게 똑같이 비를 주시는 하느님께서는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말씀을 건네심으로써
당신 사랑에서 아무도 배제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인간의 경우 말을 건네지 않는다는 것은
상종조차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이런 인간에 비해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이 말을 건네기를 거부하는
사람에게도 말씀을 건네시는 것이니 아무 데나 씨를 뿌리시는 하느님의 행위는
어리석음이 아니라 아낌없이 주심이고 가리지 않고 주심의 표시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당신 뜻을 이루시고야 만다는 말씀의 뜻 또한 사랑의 의지입니다.
우리 인간이 들을 때까지 기다려주시겠다는 것이요,
인간이 듣지 않아도 당신 말씀을 거둬들이거나 포기하지 않으시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이러한데도 우리 인간의 마음 밭은
길이거나 돌밭이거나 가시덤불일 수도 있지요.
길이란 하느님 말씀이 씨도 먹히지 않는 경우입니다.
말씀을 냉대하는 경우요 전혀 이해치 못하는 경우요
받아들일 마음이 전혀 없는 경우입니다.
돌밭이란 돌이 섞여 있는 땅이란 뜻이니
받아들이긴 하지만, 깊이 뿌리내리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비유에서 씨란 하느님 나라에 관한 말씀이라고 했는데
하느님 나라에 관한 말씀이 솔깃하긴 했지만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에서 사는 데 있어 어려움이 생기면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을 포기해버리는 경우입니다.
가시덤불이란 근심과 걱정이 가시덤불처럼 많은 땅입니다.
그리고 근심과 걱정이란 말할 것도 없이 이 세상 근심 걱정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미사나 기도 때 듣지만
이내 이 세상 살아가는 근심 걱정에 뒤덮이는 경우입니다.
하느님께 기도하면 되는데 걱정하는 경우지요.
걱정이 기도를 뒤덮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분심으로 나타납니다.
어쨌거나 한 말씀으로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느님 말씀이
우리 인간에게서 좌절되는 세 가지 경우를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셨는데
나의 마음 밭은 어떤 상태인지 또 어쩔 것인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