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밀과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주님께서 밀과 가라지로 하느님 나라를 비유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어찌 악이 있는지,
하느님께서는 선이시고 사랑이신데 어찌 악이 있고 악인이 있는지,
이런 악인들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고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는지의 문제를 밀과 가라지의 비유로 답하시는 겁니다.
우선 가라지 곧 악한 사람이 어떻게 있게 된 것인지에 대해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잠자는 사이에 원수가 와서
밀 사이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라고 비유하십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원수를 악신으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악신이 따로 있다는 이원론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원수는 굳이 악신이 아니라 악령이나
악의 세력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얼마든지 원수가 될 수 있지 않습니까?
하느님이 나를 악령으로 만들지 않으셨고,
우리 부모가 나를 악인으로 낳지 않으셨지만
우리의 부모가 잘못 양육하여 악하게 되고
내가 잘못하여 악하게 되기도 하지 않습니까?
우리말에 ‘못난 놈’이니 ‘못된 놈’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악인으로 잘 못 태어난 놈이 아니라
태어난 후 성장 과정에서 잘못된 놈이라고 함이 맞을 겁니다.
그러므로 너도, 나도, 그리고 그 누구도 태어날 때부터 가라지
곧 악한 사람으로 태어난 사람은 없고 악한 사람이 된 것인데
오늘 주님께서 비유로 정작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이것이 아닙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 있는 악한 사람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가 그 사람을 즉시, 즉시 제거할 것인가? 그대로 놔둘 것인가? 그 점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 주님께서는 우리가 제거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왜냐면 우리는 그럴 능력도 없고 자격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밀과 가라지를 구별할 능력도 솎아낼 능력도 부족합니다.
언젠가 수도원 초자에게 잔디밭의 잡초를 뽑으라고 했더니
잡초는 놔두고 잔디를 다 뽑은 적이 있는데 그런 것이지요.
우리는 가라지를 뽑으려다가 밀까지 뽑는 그런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라지를 솎아내지 말아야 하는 더 큰 이유는
그럴 자격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가라지이고, 앞서 봤듯이 우리가 원수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죄인 아닌 사람이 어디 있고 악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지금 우리나라를 보면 검찰 공화국이고,
더 나쁜 놈들인 검찰이 자기 입맛대로 기소하고 그래서 공정하지 않습니다.
물론 전 정권에서도 자기들 입맛에 맞지 않으면 솎아내려고 했고,
인간은 이토록 그럴 자격이 없는 곧 자기도 죄인인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사람을 어떻게 하는 문제는 근본적으로 하느님 소관이고,
하느님께서는 종말까지 그 문제 해결을 유보하신다는 것이 비유의 가르침입니다.
이에 대해 오늘 독서 지혜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당신께서는 힘의 주인이심으로 너그럽게 심판하시고,
무엇이든지 원하시는 때에 하실 능력이 있으십니다.
당신께서는 이렇게 하시어 의인은 인자해야 함을 당신 백성에게 가르치시고
지은 죄에 대해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희망을 당신 자녀들에게 안겨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너그럽게 심판하실 뿐 아니라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에 당신이 정하신 때까지 최대한 심판을 늦추십니다.
우리는 의인입니까?그렇다면
마지막 순간에라도 회개하기를 바라시며 기다려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는 감사해야 함은 물론 우습게 여기지 말아야 함을 알아야겠습니다.
그리고 함부로 내가 악인들을 심판하겠다고 나대지도 말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