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이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제가 요즘 감사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올해 들어 젊은 형제들이 저희 공동체에 와 같이 살아주는 것에 대해서.
저하고만 사는 것은 아니지만 저와 살아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며칠 전에 이주민 어머니와 아이들의 합동 연수회가 있었는데
그 피정 집의 고양이를 보자마자 아이들이 일제히 고양이한테
달려드는 모습이 제가 보기에 단순한 애정이 아닌 빠져드는 것이었습니다.
이렇듯이 애정이 사람이 아니라 개에게 더 향하고,
혼족, 혼밥, 혼술이 대세이기에 결혼조차 하지 않으려는 요즘 수도원에
형제들이 들어온 것만도 고마운데 저와 같이 살아주니 얼마나 고맙습니까?
더욱이 저는 저의 수도원에서 어느 시어머니보다 어렵고 살기 부담스러운 존재로
소문이 나 있는데 그런데도 저와 같은 사람과 살아주니 고맙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적인 고마움이고 인간에 대한 고마움이라면
신앙적인 고마움과 하느님께 대한 고마움도 제게는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들을 저희에게 보내주셨다고 믿는 프란치스칸이기 때문이지요.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유언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런 다음 주님께서 형제들을 내게 보내주셨습니다.”
프란치스코의 영적인 매력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얘기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형제들을 보내주셨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의 유언은 이런 식입니다.
주님께서 다 해주셨다는 식입니다.
주님께서 회개 생활을 시작하게 해주셨다.
주님께서 교회에 대한 신앙심을 주셨다.
주님께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셨다.
신앙의 눈으로, 성사적인 눈으로 본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독서 여호수아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다 선조들을 통한 주님의 섭리입니다.
조상들이 그러니까 인간들이 이룬 역사가 아니라 섭리의 역사입니다.
하느님의 섭리란 우선 무엇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계획과 그 성취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성취도 아니고 자연의 섭리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도 자연도 다 하느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섭리에 맡길 때 계획은 인간이 세우고
결정은 하느님께서 하신다는 말이 맞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인들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 안에서 우리는 섭리의 훌륭한 도구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