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영적 치매를 주의하라
겸손과 같이 일상에서 만나기 쉽지 않은 또 다른 덕은 감사함이다. 감사의 필요함은 신약의 나병환자 열 명 비유 말씀에 강하게 나타난다. 나병환자 열 명이 치유되었는데 단 한 명만이 감사하기 위해 돌아온다.
감사함과 관련하여, 오늘날과 예전은 큰 차이는 없다. 매년 산타 클로스에게 수많은 편지가 보내진다. 모든 우체국은 이 편지로 넘쳐난다. 그런데 성탄 이후 받은 선물에 대해 감사하는 쪽지 편지는 얼마나 산타에게 보내지는가? 대부분의 우체국은 한통도 없다고 말할 것이다.
데이비드 스타인들 라스트 수사는 그의 대표작인 ‘감사함, 기도의 심장’이란 책에서 이 중요한 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견가능한 것이 놀라움으로 전환되는 순간, 우리는 당연시하던 것을 멈춘다. … ‘놀라움’은 우리가 감사함이라 일컫는 그 충만함의 시작이다. 놀라움은 하나의 시작일 따름이다. 감사함이 삶에 대한 우리의 기본적인 자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놀라움의 순간 우리는 감사함이 그 문을 여는 기쁨의 단편을 접하게 된다. 더 중요한 것은 놀라움의 순간에 우리는 이미 그 문으로 한 걸음 내딛고 있다.
어떤 이들은 감사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데, 그 이유는 감사하게 되면 많은 것을 베푼 이에게 그들이 빚을 진다는 부담감 때문이다. 다른 이들은 그들이 받은 것을 당연시하고 더 많은 것을 원하며 감사하지 않는다. 영적 삶에(영적인 삶이란 결국 만족, 평화, 기쁨을 느끼며 사는 것) 큰 적대적인 것 중 하나는 자격심(entitlement)이다. 자격심과 함께 하면 우리는 항상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자격심을 가진다는 것은 슬픈 일인데, 삶의 모든 것이 선물이기 때문이다. 감사함이 없다면 우리의 영혼은 경직되어가는 위험에 처한다. 우리는 우리가 이미 받은 축복들을 간과하고 그 가치를 모르게 된다.
우리 삶에는 많은 경축할 것이 과거와 현재에 있는데, 문제는 감사함을 어디에서 시작해야 하는지 정하는 데 있다. 우리 사회는 행복을 파는 저작권을 가진 체하며, 우리에게 다른 이는 가지고 있지만 우리에게 없는 것에 대해 계속 말한다. 그 목적은 소비자가 더 많은 것을 움켜잡게 하는 소비문화를 키우는데 있다. 질투와 부러움에 기반하여 세속적인 사회는 커져만 간다. 이에 반해 영적인 공동체에서 그 목적은 우리가 놓치고 있고 이미 그곳에 있는 것을 우리가 알아차리게 한다.
감사함은 우리를 느긋하게 하며, 우리가 더 숙고하고 기도하는 삶을 살도록 돕는다. 이것은 특히 오늘날 중요한데, 오늘날 우리는 너무 바빠(심지어 좋은 일을 하는 데에도 바쁨), 다른 이들을 계속 돕게 하는 하느님의 선물들을 놓쳐버린다. 데이비드는 예수님께서 “들판의 백합을 바라보도록” 어떻게 우리를 초대하는지에 대한 자신의 깨우침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좋은 일을 하는 이는 너무나 바쁘다. 그는 꽃들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다. 활짝 핀 백합은 여섯 개의 혀로 하느님 영광을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소리친다. “멈추어서 보시오!” 시편처럼 “멈추고 알아라(시편 46,10).”라고 말한다. 그러나 바쁜 몸은 꽃들의 침묵의 화술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급하게 말하는데, “미안하지만, 나는 백합과는 말하지 않는다.” 그의 귀는 자신의 계획과 생각과 의도의 소음으로 와글거리고 있다.
만약 우리가 심오한 감사함의 영에 자신을 열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반응은 무엇이어야 하나? 그것은 놀라워함이다. 데이비드 수사는 우리 대부분은 우리가 무엇에 감사해야하는지 미리 형성한 감을 가지고 집을 나선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우리가 이 목록을 집어던지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어떤 것들에도 열려 있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것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기꺼이 내려놓아야 한다.
첨언) 프란치스코는 직접적으로 감사함에 대해 말은 많이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가난’과 ‘돌려드림’ 이라는 표현 안에는 감사함이 녹아 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가난을 말할 때, 사람들은 물질적 가난에 대해 많이 생각합니다. 프란치스코가 살았을 때, 복음적 가난 운동이 한창이어서 물질적 가난한 핫 이슈이었습니다. 복음적 운동을 하는 이들은 물질적 가난을 복음을 사는 이들의 표징으로까지 주장하였습니다.
이런 시대적 배경 하에 프란치스코와 초기 형제들은 물질적 가난을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의 가난의 출발점은 삼위의 하느님에 있습니다. 삼위의 하느님이 자신의 것을 내세우거나 챙기는 모습이 아니라 내어놓으며 하나되는 모습과, 그 사랑의 속성으로 삼위일체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세상을 이끄시는 모습에 프란치스코는 매료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를 읽어내었고 그리스도의 그 마음에 하나되는 접근을 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의 탄생, 그리스도의 공생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빵의 형상으로 우리에게 내려오시는 모습에 젖어들며 ‘그리스도는 가난이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는 가난이신 그리스도를 가난하게 따르고자 하였습니다.
이런 영성에 기반을 두고 있기에 프란치스코는 물질적 가난만을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형제들에게 가난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부유한 사람을 비난하거나 천시하지 않도록 주의를 줍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은 영혼의 해가 될 듯한 말에도 흥분하지 않고, 또한 누군가에 죄에 대해서도 분노하지 않는 이라고 한다. 가난한 사람은 자신과 상대방을 자신의 기대나 잣대로 보지 않고 하느님 자비의 마음으로 보는 이입니다.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의 가난과 하나되는 흐름 속에서 하느님의 선에 대해 소유하지 않고 하느님께 돌려드리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모든 선의 근원은 하느님이고, 하느님에게서 선이 나오기에 하느님의 선을 하느님과의 만남의 통로로 여겼습니다. 그는 하느님 선 앞에서 자신의 욕심으로 채우려 하지 않고 하느님의 선에 젖어들었습니다.
하느님 선에 젖어들며 하느님 선을 하느님께 돌려드는 예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을 것입니다. 여름 날, 시원한 물을 마시며 그냥 목마름만을 해소하지 않고, 그 시원함을 느끼면서 마시는 것. 봄 날에 들판에 나가 핀 꽃들을 보면, 그 들판에 핀 꽃과 그 향기가 자기를 채우도록 자신을 열어젖히는 것. 겨울 날, 따스한 햇빛이 창을 통해 들어올 때, 그 따스함 가운데에 있는 것. 프란치스코는 삶의 순간에 다가오는 하느님 선을 놓치지 않고 만끽하며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곤 하였습니다. 태양 형제의 노래는 프란치스코의 삶의 자세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지극히 높으시고 전능하시고 좋으신 주님, 찬미와 영광과 여예와 모든 찬양이 당신의 것이옵고 … 내 주님, 쓰임새 많고 겸손하고 귀하고 순결한 물 자매를 통하여 찬미받으시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