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마태오 복음은 어제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의 비유에 이어
오늘 열 처녀의 비유를 왜 또 드는 것일까?
두 비유 모두 언제가 될지 모르는 종말에
주님의 오심을 깨어있다가 맞이해야 한다는 가르침 면에서는 같은데,
그래서 다른 복음에는 이 비유가 없는데 왜 굳이 이 비유를 또 드는가?
불필요한 중복이 아닌가? 아니라면 무엇을 더 얘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차이점이 있다면 기다리는 사람이 종과 처녀라는 점이고,
오실 주님이 주인과 신랑이라는 점인데 이 차이점을 굳이 얘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 차이점을 얘기하고 싶었던 거라면
기다리는 우리는 주인의 종이나 일꾼이 아니라
신랑의 연인이라는 관점에서 오늘 비유를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종이나 일꾼이 주인과의 수직관계라면
연인은 위아래가 없이 동등한 수평관계라는 점도 보면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열 처녀의 비유에서 기다리는 대상이 신랑인 것은 분명한데
열 처녀가 신랑의 신부인지 아니면 혼이 잔치의 들러리인지 분명치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열 처녀가 신랑의 연인 또는 신붓감이라고 생각해봤습니다.
아직 신부가 아닌 신붓감이고 신랑을 사모하는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고 언제 신랑이 오든 잘 준비하고 깨어 기다리다 맞이하면
신랑의 신부가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신부가 되지 못함은 물론
아예 혼인 잔치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나 출발점은 똑같고 공평합니다.
다 처녀이고 신랑을 사랑한다는 면에서 똑같고,
신랑은 열 처녀에게 신부가 될 수 있는 똑같은 기회를 줬습니다.
그런데 목적지인 신방에는 들어갈 수도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신랑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처녀들에게 달린 것입니다.
제 생각에 등잔의 기름은 신랑에 대한 사랑이고 갈망이고 열망입니다.
열 처녀 모두 신랑을 사랑하고 신부가 되고 싶은 처녀들이지만
그 사랑과 신부가 되고 싶은 갈망과 열망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 사랑이라는 기름은 한 번에 왕창 준비하고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그리고 매 순간 채우는 것이고 조금씩 끊임없이 채우는 것입니다.
성가를 부를 때는 성가를 사랑과 열망과 갈망을 가지고 부르고,
기도할 때도 분심잡념 가운데 하지 않고 정신을 가다듬어 바치고,
일할 때도 종이나 일꾼처럼 일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연인에게 줄 목도리를 뜨고 손수건에 수를 놓는 연인처럼 사랑으로 함으로써
사랑을 자신 안에 조금씩 계속 채워가는 것이고 마침내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불이 뜨겁게 타오른 적이 한 번도 없는 미적지근한 사랑도 안 되겠지만
한때 불같이 사랑하고 이내 사그러드는 그런 사랑도 안 됩니다.
아무튼, 매일, 매 순간을 사랑으로 채우는 것이 등잔에 기름을 채우는 것이며
사랑이라는 기름은 일생에 걸쳐 마련해야 하는 것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