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검은 마돈나
소재지 : 스페인 카탈로니아 몽세라트 수도원
덕수궁 돌담길을 끼고 서대문 쪽으로 향하다 보면 사거리가 나오기 전에 프란치스꼬 교육회관이 주위의 고풍스런 분위기와 어울리는 붉은 벽돌집으로 나타난다
이 회관 뒷길을 따라 들어가면 수도원 건물이 있는데, 근 반세기라는 세월 속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사람들 틈에서 살기로 노력했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곳이다
이 수도원 성당은 예사롭지 않게 오른편 벽감 안에 검은 성모상이 모셔져 있어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는 좀 특별한 인상을 주고 있다.
이 성모상은 수도원을 건축할 당시 예술적 감각이 탁월했던 네델란드 신부님이 남대문 을 거닐다 고물상에서 발견하고 모시고 온 것이어서 호기심을 더하고 있다
어떤 연유로 이 희귀한 검은 성모상을 모셔왔는지 생각하면 하느님의 특별한 안배가 깃든 성모상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위의 성모상은 스페인 카탈로냐 지방의 베네딕또 대수도원에 모셔진 것이다.
이 성모상이 모셔진 “ 성모님의 몽세라트 ( Santa Maria de Montserrat) 수도원은 “톱니 모양의 산”이란 이름답게 더 없이 험한 산에 있는데 ,중세기부터 유럽의 유명한 성지로서 예수회 창설자이신 이냐시오 성인도 여기에서 큰 신앙체험을 하셨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알려진 성지인데 , 대성당 안에 검은 성모님이 모셔져 있어, 이 성지의 상징으로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대부분의 성모상이 어떤 형태이던 다 백인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 성모상은 색깔의 차원에서 좀 이질적인 검은 얼굴이며 이런 형태의 성모상은 프랑스의 로마네스크 성당에서도 간혹 볼 수 있다
이 성모상은 오래 모시다 보니 촛불의 그을음에 의해 검게 된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그 재료 자체를 검은 것으로 사용한 탓이다.
나무로 조각한 성모상에 검은 칠을 한 것이 오랜 세월 촛불 그을림까지 겹쳐 오늘의 모습이 되었다.
중세교회는 이 검은 성모상에 대해 그리 호감을 보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색깔의 일반적 상징에 의해 흰색이 순결과 선의 상징이라면 검은색은 추함과 악의 상징이 되기에 ,성모님의 색깔로서는 적당치 않다는 생각을 했으나 , 검은 얼굴의 성모상을 모시면서 순례객들이 지속적으로 많아지자 교회가 이것을 용인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기 예수님을 안고 있는 이런 성모님 모습은 역사의 긴 흐름 속에서 성상공경에 대해 광신적인 견해를 가졌던 일부 개신교도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아기 예수님을 안고 계신 성모님의 모습을 이집트 여신인 이시스(Isis) 여신 숭배에서 기원하는 것으로 주장하면서 우상숭배라는 표현으로 성모공경을 매도하는 것이었다.
가톨릭의 성상공경에 대해 개신교가 시작된 유럽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무식한 편견들이 아직도 이 땅의 개신교 어떤 교파의 지도급에 속한다는 사람들의 입이나 글에서까지 거리낌 없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이 땅에 개신교가 성숙하기 위해선 이런 문화와 예술에 대한 무지에서 벗어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생각도 한다.
독일 개신교에선 근년에 검은 성모님에 대한 세미나를 개최할 만큼 신앙의 문화 역사적 차원이 강조되고 있다.
이시스 여신은 이집트 최고 신인 호루스 ( Horus)의 어머니로 당시 사람들에게 각별한 사랑을 받으면서 그리스 로마에 까지 영향을 준 여신이다
그러나 아기 예수님을 안고 계신 성모님을 이집트 여신의 숭배에서부터 기원을 찾는 것은 문화적 무지의 소치이다.
성모 공경은 어머니의 존엄성 , 즉 어머니의 마음이 바로 하느님의 자비 표현이라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모자의 이상적 상징과 같은 성모님과 아들 예수의 관계를 통해 표현되는 것이다
이 검은 성모상은 우리 내면에 있는 어둠에서 벗어나고픈 원초적인 인간 갈망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순결한 동정녀의 상징인 성모님에게 어둠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갈망을 찾는 다는 것은 좀 생경스럽게 여겨질 수도 있다
성모님이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여 구세주를 잉태하는 과정에서 처녀로서 아기를 잉태했다는 것은 어떻게 보드라도 사람들에게 영광만은 아닌 어떤 의혹의 여지가 될 소지가 많았다
이 성모상의 검은 색깔은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뜻에 순종키 위해 받아들이셔야 했던 무거운 마음의 어두움이었다.
그러기에 성 요셉도 마리아와 혼인을 결정하고 나서 그녀가 잉태했다는 것을 알고 몰래 파혼할 마음을 먹었다는 기록까지 성서에 나타나고 있다.
(마태오 1: 18- 20)
처녀의 몸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신 성모님의 모습에서 인간 심층에 있는 어두움을 볼 수 있고, 하느님께 온전히 순종하기 위해 이런 어두움을 받아들인 성모님께 순례자들이 매달리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오욕칠정의 삶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중생들이 백팔번뇌의 어두움을 벗어나고픈 희원을 이 성모상을 통해 투사하면서 어두움의 정화와 함께 새로운 삶에의 희망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 성모님은 인간들의 마음속에 있는 어떤 어두움도 하느님 안에서 정화될 수 있다는 강한 희망의 확신을 심어주면서 , 우리 보다 먼저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면서 겪어야 했던 불안과 의혹이라는 어둠을 극복하고 구세주의 어머니라는 빛의 상징으로 서 있는 성모님이 우리를 도와주시리라는 희망을 확인하도록 도우기에 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많은 순례자들이 이어지고 있다.
우리가 빛을 향해 나아가려고 노력할수록 우리 내면에 있는 심연과 같은 어둠을 발견하게 되고 이 어두움을 극복이 바로 하느님을 향한 중요한 것임을 십자가의 요한 성인도 “어둔 밤”에서 이것을 강조하고 계신다.
이 성모상은 전통적 영성생활의 패턴인 정화와 조명과 일치의 관계성의 첫 단계를 너무도 잘 표현하고 있다.
자기안의 어두움을 발견하는 단계의 표현으로 시작하는 정화, 조명, 일치라는 영성적 삶의 기본 과정의 첫 단계를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은총이 가득하신 어머니가 되시기 위해 자신이 겪으셨던 어둠을 통과하신 성모님은 어둠속을 방황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힘을 주시기 위해 어둠의 모습으로 당신 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이시며 의자에 앉아 계신다.
정화의 단계는 즉 원초적 언어; 기도에 갈망, 욕구, 투사, 환상, 두려움, 분노 등의 내면의 무의식의 소리를 수용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이 성모상은 바로 이런 정화의 표지로 나타나고 있다.
즉 인간의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모든 어두움을 당신이 안아 해결해주실 어머니의 믿음직한 모습니다.
성모님은 자기를 찾아온 순례자들에게 당신 아들 예수님을 보라고 하시면서 어머니다운 마음으로 어둠속에 헤어나고자 하는 순례자를 위로하신다.
성모님은 결코 전능한 여신처럼 자신의 신통력으로 이 순례자의 어둠을 몰아내주시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신다.
성모님은 당신 아들 예수님이 바로 이 어두움을 몰아내고 강물 같은 평화를 주실 수 있음을 굳게 믿으시기에 순례자에게 “무엇이던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 2: 5)고 부탁하신다.
성모님은 어둠을 안고 있는 자녀에게 빨리 어둠에서 헤어나기 위해선 회개하라고 윽박지르지 않으신다.
오히려 당신이 겪으셨던 어두움의 기억을 알려주시며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하신다.
나에게도 너 보다 더 어려운 어둠이 있었지만 하느님의 힘으로 어둠에서 해방되어 지금처럼 “ 만세가 나를 행복되다.(루카 1: 48)고 칭송받고 있음을 보라고 하신다.
아기 예수님과 함께 계시는 이 검은 성모님을 통해 자기 어둠이 줄 수 있는 긍정적인 희망을 확인한 순례자는 성모송의 마지막 부분을 바치면서 그를 짓누르고 있던 불안과 갈등에서 해방된 큰 자유를 느끼게 된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의 죽을 때에 저의 죄인을 위해 빌어 주소서.”
“가장 인간적인 것이 가장 신적인 것이란” 말을 이 성모상은 너무도 잘 표현하기에 심산유곡에 있는 이 성당을 찾는 순례자들의 발길일 끊어지지 않는다.
어둠이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인간이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짐이다.
그런데 이 성모님은 바로 자기가 겪었던 어둠의 체험을 통해 어둠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중생들의 어머니가 되어 주신다.
오늘도 순례자들은 이런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쉬임없이 이 험한 산을 올라오고 있다.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수도원 성당의 검은 성모상>
우선 가까운 곳에 있는 정동 수도원의 검은 성모상 먼저 찾아가 보아야겠습니다.
그리고, 신부님
혹시 가능하시면 수도원내의 또다른 보물인 십자고상과 십자가의 길에 대해서도 소개의 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디에도 소개가 없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