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얘기인지 모르지만,
용서해 주는 사랑과 교정해주는 사랑 가운데 어떤 것이 더 큰 사랑일까?
용서해 주는 사랑과 교정해주는 사랑 가운데 어떤 것이 하기 더 어려울까?
교정해주는 것이 용서해 주는 것보다 더 어렵고,
그렇기에 교정해주는 것이 더 큰 사랑일 것입니다.
용서해 주는 것은 용서받는 사람이 반기고 고마워하는 것이지만
충고해주는 것은 충고를 받는 사람이 싫어하는 것이고,
충고를 사랑이 아니라 미움으로 받아들이기에 하기 더 어렵지요.
실로 충고를 교정을 위한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드믑니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무척 성숙한 사람이겠지요.
그리고 그렇게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자기 잘못을 고침으로써
자신도 행복해지고 충고해준 사람도 사랑의 보람을 느끼게 하겠지요.
문제는 충고를 거부하는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것입니다.
거부하는데도 충고를 계속해야 하겠습니까?
사실 충고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예상될 경우만 충고한다면
앞서 봤듯이 거의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에 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러니 충고를 받아들이건 말건 우리는 나의 사랑으로 충고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내 안에 없으면 아예 충고할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하고,
그럴 때 우리 안에 그를 위해서건 나를 위해서건 사랑부터 채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충고하려면 사랑이 내 안에 차오르도록 먼저 나를 위해 기도해야 하고,
프란치스코의 권고대로 잘못한 그에 대한 연민이 있어야 합니다.
만일 분노가 연민보다 크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고 충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는 말합니다.
“자기 원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당하는 해를 마음 아파하지 않고
오히려 그 형제의 영혼에 자리를 잡게 된 죄를 마음 아파하는 사람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충고할 때 공동체적으로 해야 합니다.
나의 사랑만으로 안 되고 나의 충고만으로 안 될 때
그것으로 포기하지 말고 공동체 힘을 빌려야 합니다.
우리는 마음 내키지 않았지만 그래도 사랑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다시 말해서 사랑의 의지로 간신히 충고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조금 있던 사랑마저 날아가 버리고 분노하거나 비난으로 바뀌기 쉽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너희가 마음을 모아 청하면”이라고 하십니다.
내 사랑만으로 안 될 때 그것으로 포기하거나 뒤에서 비난하지 말고,
내 작은 사랑만으론 불가한 것임을 겸손히 인정하고 같이 기도하자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공동체는 이런 청을 받아들여 같이 기도하고 같이 포용해 들여야 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충고할 때 하느님 대신 충고해야 합니다.
오늘 에제키엘서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 사람의 아들아, 나는 너를 이스라엘 집안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그러므로
너는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해야 한다.”
사실 우리의 사랑은 하느님 사랑을 대신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니 우리 사랑을 결코, 작게 여기거나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고,
그러니 충고 역시 함부로 하거나 즉흥적으로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느님 사랑을 대신하는 만큼 나의 사랑을 하느님 사랑으로 키워 충고해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