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평화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통해서 또 한 가지 바라볼 수 있는 것은 교회의 일치적인 관계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의 한 그루만을 보았을 때에는 하나의 모습이다. 그러나 서로 서로 성분이 다른 바람과 나무와 땅이 서로가 서로에게 되어주고, 그렇게 서로가 다르지만 서로에게 되어줌을 통해서 하나의 모습으로 보여 질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되어주지를 못한다면 따로따로가 된다면 하나의 모습으로 나오지 못할 것이다. 흔들리지 않거나 아니면 나무가 쓰러지거나 혹은 가지가 부러지거나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예를 든다면 하느님께서도 한분이시지만, 성부와 성자와 성령 세 위격이 계시고, 서로가 서로에게 되어주고, 역할을 함으로써 일치를 이루고 하나가 되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 되는 것과 같고, 그래서 하느님은 한분이신 것과 같다.
그래서 우리의 교회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누구나 다 다르다. 똑같은 사람이 없다. 성격도, 얼굴도, 뭐든지 다르다. 비슷한 사람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같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면만을 강조한다면 그 공동체는 깨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되어주고, 각자 맡은 역할을 다 함으로써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는 하나를 이루어 나갈 것이다. 이는 마치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같은 것이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와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되어주는 것, 역할을 다한다는 것은, 서로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말씀을 제가 이들에게 주고, 이들은 또 그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제가 아버지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참으로 알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 저는 이들을 위해서 빕니다.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은 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통하여 제가 영광스럽게 되었습니다. ...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요한 17,7-11)이처럼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아버지와 당신 자신과 제자들과의 관계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되어주고 받아들임을 통해서 하나 됨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도 이와 마찬가지로 각각 서로서로가 다르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되어주고 받아들여줌으로 인해서 하나가 될 수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꼭 교회 안에서 만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자연의 만물이 그러하다. 나는 초등학교 때 만물이 서로가 서로에게 되어주는 관계 도움이 되어주는 관계 서로의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것을 "공생관계"라고 배웠다. 물론 이것은 곤충이나 동물들하고의 관계에서만 공생관계가 되는 것이 아니라 굳이 넓게 본다면 모든 자연의 만물 중에 안 그런 것이 어디 있겠나? 공기, 물, 산, 바다, 흙, 미생물부터 시작해서 식물, 동물,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래서 우리는 생명을 생명이라고만 하지 않고 "생명체"라고 한다. 비록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미생물일지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생명체이다. 각기 다른 생명들이 모여 서로가 서로에게 되어줌으로 인해서 주고 받아들여지고 그렇게 해서 서로가 서로를 살리고 산다. 그래서 생명체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가정도, 사회도, 교회도, 수도회도, 세상도, 공동체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되어주고, 주고받고 하는 공동체이다. 그러나 그것이 깨진다면 서로 지탱할 수가 없을 것이다. 난 살아오면서 가끔씩 꿋꿋이 서 있지 못하고 쓰러져 있는 나무를 가끔 보기도 한다. 뿌리를 내렸지만 땅이 척박해서 기름지지 못해서 말라죽은 나무, 그리고 꿋꿋이 서 있지만 태풍이 불어와 너무 강한 바람 탓에 부러져 죽은 나무, 그리고 땅도 기름지고, 바람도 서늘한 바람이지만 나무 그자체가 약해 말라죽은 나무, 우리는 사소한 것에서 배워야 할 필요도 있다. 물론 학교에서나 신학교에서 명성이 있는 교수님에게서 책을 통해 강의를 통해 배우고 해외 유학 가서 석사 박사 학위를 따서 배우는 것도 당연히 필요로 하지만 말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의 사소함에서도 많이 배울 수 있다.
그런데 어떠한 방식으로 배우든지 그 배운 것을 행위로서 실천해야 그 빛을 발한다는 것은 시대가 변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난 과연 실천하고 있는가? 아니면 글만 쓰고 있는가? 흐릿한 날씨의 오늘 반성하기에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