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기도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촉진자',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교부들의 말씀 묵상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루카 10,21)
아이들이 구원받을 준비가 더 잘 되어 있다
죄를 회개하고 사악함을 버리고 세례를 받아 정결해지고 나면, 아이들이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듯 우리는 영원한 빛으로 돌아갑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스승님께서는 우리를 ‘철부지들’이라고 표현하십니다. 이는 스스로를 지혜롭다 여기며 제 눈을 가린, 세상에서 지혜롭다는 자들보다 우리가 구원받을 준비가 더 잘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분은 어린아이처럼 기쁨에 넘쳐 큰 소리로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분께서 세상에서 아는 것 많고 지혜롭다는 자들에게 감추어진 것을 작은 이들에게 드러내 보이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엑카르트의 영성에 영향을 준 신학들
5. 아우구스티누스를 경유한 신플라톤주의:
아우구스티누스가 엑카르트의 영성에 영향을 주었다는 말은 크게 과장된 것이다. 이러한 과장으로 인해 엑카르트의 영성신학은 창조 중심 신학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 의해 왜곡되고 말았다. 그들은 아우구스티누스를 신봉하는 자신들의 성향을 엑카르트에게 투사했을 따름이다. 우리는 그러한 두드러진 왜곡의 예를 베네딕도회 켈리의 저작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엑카르트의 영적인 오솔길 둘째 단계에서 연구를 끝내며, 이렇게 말한다: 엑카르트는 “신실한 사람들 가운데서 자신들이야말로 사회의 불의를 치유하는 동인임에 틀림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들지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을 창조 영성에 투영하는 사람의 전형이라도 되듯이, 켈리는 엑카르트가 말하는 “관상”에 대해서는 장광설을 늘어놓으면서도, 정작 “자비”라는 용어를 색인에 포함시키지도 않는다. 이와 같이 그는 엑카르트가 충만한 영성 경험의 의미로 받아들인 자비를 완전히 놓치고 말았다. 그는 물론이고 엑카르트를 왜곡한 다른 사람들도 본서의 넷째 오솔길을 훓어보는 게 좋을 것이다. 라이너 쉬르만이 정확히 이해한 대로, 엑카르트의 영성은 관상의 영성이 아니라 자비의 영성이다, 엑카르트에게 자비는 우주적인 자각과 사회정의를 의미한다.(71)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12월 1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2티모 1-4장 / 티토 1-3장
<생태 돌봄 주간>
자신. 이웃. 동물과 식물. 자연환경
개인 혹은 공동체 차원에서 먼저 하루를 정해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예수님, 천국에서 의로우신 당신을 노래하는 의롭고 올바른 사람들과 함께 당신을 흠숭합니다. 당신은 모든 이에게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히는 마음을 심어주시니 찬미받으소서.
당신의 정의를 따라 살고 일하기로 결심한 모든 이 안에서 당신을 찬미합니다. 불의에 고통당하는 모든 이의 아픔을 봉헌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고해지지 않게 하시고 그들이 당신의 말씀을 믿으며 성령 안에서 기뻐하게 하소서!
0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이들! 그들어 흡족해지리니."
(침묵 가운데 반복한다J(228)
-성시간, 슬라브코 바르바리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