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자기 앎의 새로운 길을 걸어보기: 영적 관심을 키우기(intrigue)
자기 앎은 최상의 환경에서도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가 오해나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느끼거나 걱정스럽거나 방어적이거나 두렵거나 수용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자기 앎은 진실로 가이드 레일(안내 선로)이 없는 여정이다. 그런데 우리가 자신이 경험하는 문제에 자기 생각들과 신념들이 얼마나 책임이 있는지 기꺼이 인지하려 한다면, 그리고 우리 문제를 다른 이에게 투사하는 것을 철회한다면, 그리고 우리 시간 스케줄에 따라 결과들을 요구하는 것을 멈춘다면, 전혀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곳에서 가능성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하기에 자기 앎은 내가 소위 말하는 ‘영적 관심’(intrigue)이라는 감각의 씨앗을 우리 안에 뿌릴 때 다가올 수 있다. 영적 관심(intrigue)는 감정들에 온전히 매이지 않으며 우리나 다른 이가 행한 것들을 판단하지 않고 바라보는 태도이다. 이런 행위들은 무언가에 대한 반응이거나 무언가를 시작하기 위한 것이며, 이 행위들은 문제를 최소화하거나 과장할 수 있다. 어떤 경우라도, 우리는 자신이나 다른 이를 비난하거나 탓하지 않으며 어떻게 그리고 무슨 이유로 불만족스러운 상황들이나 관계들을 선택하고 매여 있는지 집중한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자신과 다른 이와의 관계를 개선할 수 있었는지 바라보기 위해 특정 사건들에 집중함으로 가장 효과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
행동하기 위한 계획, 독창성, 자발성은(심지어 용기까지) 자기에 대해 아는 데에 도움을 줄 뿐 아니라 우리가 배운 것을 실행하고 또한 그것이 어떤 수정이 필요한지 알도록 돕는다. 세상의 조건화 때문에, 영적 관심의 길은 진실로 우리가 걸어야 할 다른 길이다. 사회는 전통적으로 그것은 다른 누군가의 탓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자신이나 다른 이를 탓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누군가를 탓하는 것은 많은 경우 우리를 아무 곳에도 데리고 가지 못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삶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자신의 역할을 잘 했는지 혹은 못 했는지 알 수 있다. 이 통찰은 자기 비난의 원인이 되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우리가 낭비한 힘을 다시 회복하는 접근이 되어야 한다. 아주 심각한 상황에서도 이것은 필요하다.
나는 일 년 전에 직장과 가정에서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한 동료가 기억이 난다. 그녀는 겸손함과 상식을 가졌기에 지지를 얻고 또한 명료화하기 위해 상담 치료사를 찾았다. 그녀는 계속 그런 식으로 사는 것은 견딜 수 없을 뿐 아니라, (심리학자로서의 지식으로) 크게 불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가 나에게 그것에 대해 말했을 때, 나는 그녀의 결정을 칭찬했다. “당신이 자신에게 숙고와 피이드백을 허용하는 것은 좋은 시간이 될 것이다.” 나는 위험이 항상 기회와 동반함을 알고 다음 말을 덧붙였다. “그렇지만 당신이 이미 심리치료사로서 알고 있듯이, 당신이 이 과정에 들어갈 때 위험은 있을 것이다.”
그녀가 나에게 어떤 위험을 감지했는지 물었을 때, 나는 말했다. “당신은 지금 이용당했다고 오해받았다고 느낀다. 그러하기에 당신이 치료사에게 갈 때, 다음과 같은 하나의 희망을 가지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즉 한 희망으로 치료사가 당신의 상황에 대한 이해에 동의하는 지지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런데 치료사는 자신이 가능한 한 명확하게 사건들을 바라볼 때 당신의 입장을 지지할 수 있다. 즉 당신이나 다른 누군가를 비난하는 거리로 삼지 않고 당신이 일들을 더 낫게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최대한 이해하도록 해준다. (비록 우리가 심리학자이지만) 그 상황의 얼마나 많은 것이 사람들에 의해 혹은 환경이라는 사건들에 의해 야기되었던지 간에, 관건이 되는 것은 그 상황에 대한 우리의 이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삶이 진정 어떻게 될지를 결정하는 진정한 힘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다.”
영적 지혜는 명확하게 보는 것에 대한 것이고, 우리가 자신에게 그리고 다른 이에게 접근함에 온화하고, 우리의 생각이나 습관들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는 하느님을 막아서지 않도록 하는 것과 연관이 있다. 영적 관심 키우기가 없다면, 심리적인 접근도 성숙함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우리 영적 양성의 핵심인 하느님을 찾는 것 또한 진보하지 못할 것이다. 본질적으로 영적 관심을 키우는 것은 내가 이 책을 쓴 중심이었다. 만약 내가 그렇하고 말한다면, 당신과 같이 이 책을 읽는 이에게도 그럴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여시는 출입문으로 들어가려 한다면, 우리는 영적 관심이라는 감각을 가져야 한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중심적인 부르심인 자비에 응답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자기 마음에 영적 관심이라는 감각을 유지하여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할 때, 그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충실함에 집중할 것이다. 우리는 궁수처럼 될 것인데, 성공이 주의를 산만케 하지 않고 화살은 과녁을 향해 방해없이 날아갈 것이다. 이 영적 관심은 20개의 공부의 목적이었고 이 책의 다음 두 장의 목적이기도 하다.
첨언)
우리는 영적 관심을 지니고 있고 이를 키우고 있습니까? 영적 관심이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준주성범이라는 책이나 영적 서적을 읽는 것이 영적 관심을 키우는 것일까? 그런 책을 읽는 것이 영적 관심을 키우기도 하고 오히려 영적 관심의 방해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차라리 자신의 삶이나 다른 이의 삶을 하느님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그 가운데에 하느님의 마음을 공부하는 것이 어쩌면 더 큰 영적 관심을 키우는 법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자기에게서 영감을 받아 수도생활을 시작한 클라라와 자매들에게 이상한 생활 양식을 남겼습니다. 일반적으로 생활 양식이라면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해야 한다’가 담긴 내용입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는 클라라와 그의 자매들에게 준 생활 양식에 그러한 내용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자매들이 이미 살고 있는 삶이 진실된 삶이기에, 자기와 형제들은 이를 지지하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영감으로 지극히 높으시고 지존하신 임금님, 천상 성부의 딸과 여종들이 되셨고, 거룩한 복음의 완전함을 따라 사는 것을 택함으로써 성령의 정배들이 되셨기에, 나는 직접 그리고 나의 형제들을 통하여 나의 형제들에게 가지고 있는 만큼 여러분에 대해서도 애정 어린 보살핌과 특별한 관심을 늘 가질 것을 바라고 약속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