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어제 복음은 엘리사벳의 마리아 찬미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마리아의 하느님 찬미입니다.
그런데 두 찬미의 내용도 아름답지만
찬미하는 두 분의 모습도 아름답습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찬미하고,
마리아는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우리도 서로 이런 식이면 좋겠습니다.
이웃이 은총을 받았을 때 시기하거나 흠잡지 말고 칭찬하고 칭송하고,
그 칭찬과 칭송을 받은 사람은 은총을 자기 공으로 꿀꺽 삼키지 않고
은총을 주신 하느님께 찬미를 드림으로써 덕을 돌려드리는 그런 식 말입니다.
아무튼 오늘 마리아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찬미의 내용은 구원의 은총에 대한 찬미입니다.
그런데 구원의 은총에 대해 찬미하지만
먼저 자기에게 베푸신 은총을 찬미하고
이어 자기를 통해 모두에게 베푸신 은총을 찬미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미천한 자신을 구원해주심에 대해 찬미하는데,
마리아가 자신을 미천하다고 하는 뜻을 잘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사무엘기의 한나가 미천한 자신을 구원하신
하느님께 찬미하는 것과 같이 이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둘 다 미천한 자신을 구원하신 하느님을 찬미하지만,
한나는 아기를 못 낳는 처지였고 그래서 진짜 비참한 처지였던 데 비해
마리아는 전혀 그런 처지가 아니었으니 마리아가 자신을 미천하다고 한 것은
다른 의미라고 우리는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입니까?
사람들 앞에서 미천함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그리고 하느님의 은총 앞에서 미천한 것입니다.
하느님과 하느님의 은총 앞에 있는 우리는
미천하고 그 은총을 받기에 늘 죄인입니다.
우리는 종종 그 반대잖아요?
존재로나 사랑으로나 은총으로 모든 면에서 더 크신 하느님 앞에서는
무시하고 대들고 원망하고 하느님보다 훨씬 못한 미천한 인간 앞에서는
자신이 쫄아들고 열등감을 느끼며 자기를 미천하게 생각하잖습니까?
그러나 마리아의 미천하다는 느낌은 성사적인 것이고,
그렇기에 하느님 찬미로 자연스럽게 이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뿐 아니라 모두를 구원하시는 하느님 은총으로 찬미가 확장됩니다.
이것은 즈카르야의 찬가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하느님 구원의 은총을
제대로 체험한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공통 현상입니다.
하느님은 한 사람만 또는 자기만 구하시는 하느님이 아니십니다.
하느님은 한 사람의 구원을 통해 모두를 구원하시고자 하십니다.
우리도 하느님으로부터 은총을 받으면 날름 삼켜버리고 입 싹 닦는
그런 사람이 되지 말고 나누라고 주신 은총을 확장하라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