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오늘의 주제는 ‘인간이 버린 사람을 하느님께서 귀하게 쓰시고,
인간이 죽인 사람을 하느님께서 살리신다.’로 해도 좋을 겁니다.
요즘 들어서 우리 인간은 참으로 많은 것을 쓰레기로 만듭니다.
실로 얼마나 많은 것을 우리 인간이 버립니까?
그것을 저는 저희 아나바다 장터에서 실감하는데
전국에서 여러분들이 물건을 보내 주시는 덕분에
저희 장터는 성업 중이고 의미 있는 사업이 되었지요.
그래서 그냥 쓰레기가 될 것을 재활용할 수 있도록
협력해주신 여러분에게 늘 감사를 드리고 있지만
마냥 좋게만 볼 수 없는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프란치스칸마저 신자유주의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실로 신자유주의가 끊임없이 소유와 소비를 부추기는데
우리 프란치스칸들조차도 이 부추김에 넘어간 것입니다.
과거 우리 교회의 가르침이나 교회 밖의 건전한 가르침들은
필요 이상으로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을 욕심이라고 규정하고
우리 인간의 그 끝없는 욕망과 욕심을 억제하라고 가르쳤는데
신자유주의는 소유욕과 욕망들을 죄악시하지 말라고 부추기지 않습니까?
신자유주의는 그러면 왜 그렇게 합니까?
우리 인간의 행복을 위해 그렇게 하는 겁니까?
아니지요.
기업이 잘 돌아가고,
그래서 기업이 많은 이윤을 내게 하기 위해서지요.
부추김, 이것이 실은 창세기 뱀의 유혹입니다.
뱀은 아담과 하와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리킵니다.
너희가 다 가졌고 다 따먹는데 낙원 한가운데 저 나무 열매만은
못 따먹는 것 아니냐고 일깨우고 따먹으라고 부추기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나무가 뭐냐 하면 바로 선악과,
곧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입니다.
그 열매를 따서 먹는 순간
하느님만 아셔야 할 선과 악을 인간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뜻대로 생겨난 모든 것을 보시고 좋다고 하셨고,
그래서 선이란 하느님 좋으실 대로 된 것인데
그런데 인간이 자기 좋을 대로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 결과 바란 대로 된 것은 선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악이 된 것이며,
바란 대로 된 선 곧 좋아하는 것은 소유하고
바란 대로 되지 않은 악 곧 싫어하는 것들은 버려버리게 된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중심적으로 소유하고는 버립니다.
더 좋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덜 좋은 것을 버려 쓰레기로 만들고,
새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쓰던 것을 싫증 내고는 쓰레기로 버립니다.
그런데 너무도 놀라운 것은 이 자기중심적 소유와 소비가
물건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자기 욕망과 필요에 따라 인간마저 소유하고 버립니다.
욕망 때문에 애를 낳고는 성가시다고 애를 버립니다.
좋을 때는 사랑한다고 하고는 싫어지면 사랑을 버립니다.
하느님마저도 필요할 때는 소유하고
욕망의 순간이나 필요 없을 때는 버려버립니다.
그러나 사랑이신 하느님은 그렇게 버린 인간을 귀하게 여기시고,
우리 인간이 버린 주님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으십니다.
좋아하고 소유하는 인간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느님,
그 큰 차이를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