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주님께 돌아가자.
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
오늘 호세아서는 “자”로 시작하는데
오늘 저는 이 “자”라는 말이 왠지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자”라는 말은 “자, 이제 조용히 하고 ---합시다.”처럼
지금까지 하던 것을 멈추거나 떠들고 있던 것을 멈추고
“자”라고 하는 사람에게 시선을 돌리고 그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하고 그가 하는 말은 무엇입니까?
두 가지, “돌아가자.”와 “알도록 힘쓰자.”입니다.
주님께 돌아가자는 것과 주님을 알려고 힘쓰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 주님께 돌아가자.”라고 하는 것은
지금까지 주님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있었다는 것인데,
누가 저에게 이런 말을 하면 나는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주님 앞에 줄곧 있었다거나 지금은 주님 앞에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다시 “자, 진정 주님께 돌아가자.”라고 얘기할 것입니다.
주님 앞에 있는다고 있지만 제가 참으로 주님 앞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비유로 드신 바리사이를 생각해봅시다.
그는 하느님 앞에 서 있고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온전히 하느님 앞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 올바로 기도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하느님 앞에 있는 것 같지만 세리와 자신을 비교하고 있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자기의 의로움 자랑하고 있습니다.
자랑은 다른 인간들 앞에서나 하는 것입니다.
누가 하느님 앞에서 자랑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 그는 하느님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곧 세리 앞에 있는 것이며,
하느님 앞에 있다 하더라도 자랑할 수 있는 인간 정도로 하느님을 생각한 겁니다.
진정 그리고 오롯이 하느님 앞에 있다면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할 수 없고,
자기의 의로움을 보고 자랑할 수 없고 자기 죄 외엔 아무것도 볼 수 없을 겁니다.
그러니 진정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은 오늘 복음의 세리이고,
“자, 돌아가자.”라고 하는 것도 이제 진정 하느님 앞에 세리처럼 서자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자, 주님을 알도록 애쓰자.”라는 말을 보겠습니다.
이 말은 지금까지 주님을 잘못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을 뇌물을 좋아하고,
우리의 마음보다 십일조를 좋아하고,
겸손한 마음보다 희생제물과 번제물을 더 좋아하는 분으로 안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을 몰라도 너무도 모르는 것이고,
잘못 알고 있어도 너무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하느님을 결핍이 있는 인간처럼 알고 있고,
그 결핍을 채우려고 욕심을 부리는 인간처럼 하느님을 알고 있으며,
그 결핍을 인간을 통해서 채우려는 존재쯤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오늘 호세아서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
“it is love that I desire, not sacrifice,
and knowledge of God rather than burnt offerings.”
자, 우리도 이제 확실히 압시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의 겸손과 사랑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