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기도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촉진자',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2024년 3월 21일 목요일
교부들의 말씀 묵상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요한 8,58)
신성에는 과거도 미래도 없다
신성엔 과거도 미래도 없고 항상 현재만 있기에, 그분께서는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에 있었다”고 하지 않으시고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말씀하실 때도 “나는 있는 나다”라고 하시며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탈출 3,14)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당신의 현존을 드러내심으로써 가까이 오시고 당신 생명을 완성하심으로써 떠나실 수 있었던 분은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에도 계셨고 후에도 계셨습나니. 진리는 언제나 존재합니다. 시간 속에서 진리 이전에 생길 수 있는 것도 없고 시간 이후에 끝나는 것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대 그레고리우스-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4 존재는 거룩하다
존재와 하느님을 경험하고 하느님 안에 있는 존재를 경험하기 위하여 우리가 일치된 생명 속으로 뛰어들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딘가 다른 자리에서 엑카르트는 “둘로 가르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이분법은 우리의 눈을 가려, 꽃 한 송이마저 마음껏 뽐내는 존재의 신성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모든 이분법이나 대립은 지혜의 빛에 굴복하게 마련이다. 통합된 의식의 상태에서 모든 것은 알려지게 마련이다. 엑카르트가 분열된 사랑에서 통합된 사랑으로 우리를 이끌어 달라고 기도하면서 설교를 끝맺은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우리가 유한하며, 죽을 수밖에 없다는 직관을 가지고 순교자들에 대한 설교를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가 분열된 사랑에서 통합된 사랑으로 옮겨 가기만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유한성과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엑카르트가 말하는 통일은 삶과 죽음의 통일, 현세와 내세의 통일,하느님과 우리의 통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존재의 통일, 존재의 전체성,존재의 성스러움이다. 그것은 하느님과 그분 말씀의 합일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겪는 모든 것에는 끝이 있지만, 존재는 끝이 없다. 존재는 영원한 하느님과 너무나 가깝다. 그것은 하느님만큼 거룩하고, 하느님과 너무나 닮아 았다. 우리가 존재와의 사랑에에 빠지기를 거부하지만 않는다면, 그 무엇도 하느님과 우리를 갈라 놓지 못한다.(140)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3월 3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마태 23-26장
<생태 문화 주간> 음악/미술/독서 등. 생태 품앗이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4장 오직 고통뿐
과격당원의 폭력사건
구당국도 군당국도 이 ‘진보사상’을 지지하는 것을 명예라 생각하고 만약 이 파티마의 종교 운동이 중지되지 않을 경우에는 엄한 억압 술책을 쓰지 않을 수 없다고까지 선언하였다.
알쥬스트렐의 불쌍한 농민들은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제 정신을 잃고 그들의 평화를 휘저어 어지럽게 한 아이들에게 그 책임을 지우려 했다.
그 중에서도 루치아가 마을을 지나갈 때면 중오를 품은 조롱의 말을 여기 저기에서 들을 수 있었다.
“야아, 우리의 벨라렛다님이다..."
루치아, 프란치스코, 히야친타는 심술궂은 폭언을 들으면서 점점,,더 열심히 고행의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데 애를 쓰고 힘을 다했지만 그들에게는 하늘에 계시는 사랑하는 친구님의 기대를 채워 드리지 못한다는 고통이 사람들이 던지는 욕지거리보다도 더 심한 고통으로 그들의 마음을 죄었다.
여기서 발현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의 사명에서 생기는 온갖 희생을 바치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서 자기네들이 상상하는 성인, 또는 전에 성인들의 생활에서 찾아낸 고행을 주위 사람들이 눈치채지 않게끔 스스로 실행하는것이었다.(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