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하신 주님의 영에 사로잡혀 아직 걸어가지 않은 길을 가는 사람들
창조는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자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사랑으로 창조하신 피조물을 통하여 당신의 사랑을 내어주실 수 있도록 사랑의 대상인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도 같은 방식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며 내어주시는 사랑을 받아 나도 나를 내어줄 수 있는 대상인 너를 통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게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볼 수 있게 하는 관계성 안에서 발견하는 선은 삼위일체 하느님으로부터 너와 피조물을 통하여 나에게 전달된 선이며 나는 빛을 받아 빛을 내는 도구로서의 행복을 지금 여기서 누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주님의 영께서 존재하는 생명들에게 숨을 불어넣어 주시고 더불어 살아가도록 돌보아 주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다른 어떤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보고 듣고 맛보는 오감의 창을 활짝 열고 온몸으로 느끼는 하느님이 아니고서는 지금 여기서 하느님을 알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자기네 삶으로 들어오신 하느님을 지적 개념으로 말하지 않고 경험된 지식을 통해 하느님을 믿게 했습니다.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에서 “열한 사도들은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증인은 성령의 활동을 마음에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바람, 불, 기쁨, 흥분, 공유된 선, 등 성령의 현존을 가리키는 비유들이 얼마나 역동적이고 살아 움직이며, 보편적인 것 인가를 우리는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영의 활동을 깨닫게 되는 것은 우리의 노력과 업적과 공로로 받는 것이 아니며, 그러한 공로가 없는데도 거저 받는 은총입니다. 그분께서는 언제나 먼저 일하십니다. 첫 번째 오순절 이야기에서 사람들은 친밀함과 깨달음, 바람, 기쁨, 불, 그리고 온갖 경계와 인종을 넘어서는 사랑의 힘으로 성령을 경험합니다. (사도 2,1-13 성령강림) 그 영의 활동을 우리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놀랍고, 이해되지 않으면서도 자유롭고 그러면서도 전적으로 주어지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노력으로 통제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굴복하고, 즐기고, 나누는 것이 전부입니다.
“불고 싶은 곳으로 불어오는 바람”처럼 절대적으로 하느님의 자유에 속한 영역을 우리는 무엇으로도 통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바깥에서 영의 현존을 찾지만, 성령께서는 언제나 “여기, 안에” 존재하는 온갖 것들 사이에 계십니다. 일상의 관계에서 철저하게 도구로써의 ‘나’를 인식하고 내 안에 영의 거처를 마련하는 내적 가난과 겸손으로 온전히 나의 자유를 내어드릴 때만이 그분은 일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모든 개체를 개별적으로 존중하고 사랑하시며 강요하시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선의 흐름이 있는 곳에 현존하시는 영의 활동을 통해 우리는 기쁨을 얼굴에 지니고 살아갑니다.
자기가 하는 일을 의식하고 목적으로 삼는 사람은 사랑이라는 명분으로 그렇게 하지만 사실은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자신이 하는 일을 잘 모릅니다. “저희가 언제 주님이 굶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시게 해드렸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너희가 지극히 작은 내 형제 가운데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 25,) 그들은 예수님을 위해서나 사랑을 위해서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종교적 의무감이나 불순한 동기 없이 그냥 그렇게 했을 뿐입니다. 필요성을 느낄 때마다 그냥 그렇게 했을 뿐입니다. 올바른 말을 하거나 올바른 의식을 수행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계명 준수나 도덕적 성취와는 상관없이 올바른 현실을 어떻게 사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관계 안에서 발견된 너의 필요성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거부하지 않고, 가로막지 않고 말없이 그냥 필요를 채우는 가운데 영의 현존을 발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임명장을 내세우고 “주여! 주여!” (마태 7,21) 하는 자들에게는 눈길을 주지 않으십니다. 예수께서는 두 아들의 비유(마태 21,28,32)로 정확하게 밝히셨습니다. 말로는 아버지 명을 따르겠노라 하면서도 따르지 않는 아들이 아니라 처음엔 따르지 않겠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아버지의 말을 따랐던 아들이 영의 현존을 느끼고 살아가는 이들이라는 점을 일깨워 주십니다.
자기방어를 하지 않은 채 자기 생명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 일상의 관계에서 경험하는 일입니다. 사랑은 자기 죽음을 동반하지만 죽음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너를 위해 내가 죽는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사람은 인정과 칭찬과 사람들의 좋은 평가를 듣기 위한 것이지 하느님 사랑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많은 양의 기도문을 외우거나 희생을 셈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이 하는 일을 반복해서 말합니다.
가난하고 온유하고 자비로운 사람은, 기쁨과 자유를 온몸으로 표현하므로 영의 현존과 거처를 드러냅니다. 내어주는 죽음의 현장에서 누리는 부활의 기쁨과 생명은 그렇게 관계를 비춥니다. 사랑은 그렇게 길을 발견하고 찾아냅니다. 주님께 사로잡혀 아직 걸어가지 않은 길을 가게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영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서 있고,” “하느님 나라는 너희들 가운데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호명은 개별적으로 나를 부르시는 목소리입니다. “마리아야” “라뽀니” “너희는 살아계신 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 부활하신 주님은 살아있는 자들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죽은 자들 가운데 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