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오늘 주님께서는 주님 안에 머무는 사람,
자기 안에 주님을 모시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결론처럼 얘기하면 아무리 주님 안에 머물러도
주님을 자기 안에 모시지 않는 사람이 있고 그런 사람은
아무리 주님 안에 있어도 아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제 생각에 우리 인간은 싫건 좋건 주님 안에 머뭅니다.
그러나 무신론자가 주님을 자기 안에 모시지는 않지요.
그것은 공기 안에 머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공기 안에 있으면서도 공기를 들이켜지는 않는.
그런데 왜 주님을 자기 안에 모셔 들이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간단하고 분명합니다.
주님이 싫거나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다른 것을 더 좋아하고 사랑하여
그것이 내 안방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심지어 죽겠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먼저 우리는 주님 안에 있다는 것부터.
세상이 아니라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을.
사실은 세상도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을.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좋다고 하셨다는 것도.
이것들을 깨달았어도 그다음 모셔 들이는 것이 뒤따라야 합니다.
아무리 이런 사실을 깨달았어도 주님을 모셔 들이기 싫다면,
앞서 봤듯이 그것은 공기 속에 있어도 공기가 싫은 것과 같고
바닷속을 휘젓고 다녀도 그 물을 들이켜기 싫은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말에 ‘죽어도 하기 싫어’라는 말이 있는데
주님을 모셔 들이는 것이 진정 죽어도 싫습니까?
그렇지 않겠지요.
죽어도 하기 싫다는 말은 과장법이고,
주님을 모셔 들이지 않으면 죽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 모셔 들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주님을 모셔 들이지 않아도 당장 죽지 않기에
주님이 내 안에 아니 계셔도 살 수 있고
젊었을 때는 내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런데 사실을 얘기하면 생명 연장이고 시간 유예입니다.
잘린 가지나 수액 공급이 끊긴 가지도
가지 안에 아직 남은 수액으로 생명 유지를 얼마간 하지요.
그런데 이것이 실은 주님의 시간 유예에 의한 생명 연장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시간을 벌어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비유를 드신 적이 있지요.
어떤 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자 주인이 농부에게 그 나무를 베어버리라고 합니다.
그러자 농부가 한해만 시간을 더 주면 자기가 열매 맺게 해보겠노라고 청한다는
비유 말입니다.
여기서 주인은 하느님 아버지시고 농부는 주님 당신 자신이시지요.
이 비유 말씀처럼 농부이신 주님은 우리를 깨우치려고 애쓰십니다.
온갖 비유와 말씀을 가지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두 번째로 깨달아야 할 것은
당신을 모셔 들이지 않으면 죽게 된다는 주님 말씀을,
주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주님 말씀을,
그저 엄포라고 무시하지 않고 정말 그런 것임을 깨달아야 하고,
깨달았다면 주님과 함께 주님 말씀도 모셔 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주님 말씀은 엄포가 아니라 진실이고 진리임을
다시 한번 묵상하고 모시는 오늘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