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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신비는 두려움의 신비와 매력으로 끌어당기는 신비와의 충돌

by 이마르첼리노M posted May 24,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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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신비는 두려움의 신비와 매력으로 끌어당기는 신비와의 충돌

 

프란치스칸 가난은 자기를 열어드리고 내어드려 하느님께서 말씀을 잉태할 모태가 되게 해드리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철저하게 도구적 존재로써의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가난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나를 포기하게 합니다. 관계 안에 선이 흐르도록 하려면 내려가고 내려놓는 자기 포기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가난의 실재입니다. 자기 포기라는 내면의 죽음이 없이 하느님을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루가복음은 포기의 복음으로도 불립니다. 루가복음 사가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돈이나 눈에 보이는 우상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내면의 우상과 관심사까지 모두를 포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복음은 혁명적입니다. 뒤집어엎는 복음입니다.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루가 13,30) 것과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하찮게 보신다는 것, 세상의 꼭대기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하느님 눈에는 밑바닥에 있다는 것, 세상의 밑바닥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하느님 보시기에는 꼭대기에 있는 것을 온갖 이야기를 동원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루가복음은 자비의 복음으로 폭넓은 용서가 많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를 포함하여 잃었던 아들과 기도하는 세리에까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람들을 용서하시는 예수님이 출현합니다. 용서는 새로운 창조로써 관계 안에 잉태된 말씀을 출산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했다는 사실은 마리아께서 하느님께 그렇게 해달라고 청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다가가셔서 잉태되었다고 루가복음은 전해주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한 것이 우리와 다르게 영웅적인 무엇을 행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마리아가 자기를 열어놓았을 때 그분은 세상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잉태한 어머니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전부는 자기를 열어놓는 것 곧 자신의 자유와 의지를 내어드릴 때 우리에게도 주님의 영이 우리 안에 말씀을 잉태한 모태가 되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말씀의 잉태는 관계 안에 하느님의 자비와 선을 낳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믿음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일반적으로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우리 모두 그것이 무엇이든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원초적으로 두려워하는 대상들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통제권 밖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복된 소식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두려움을 뚫고 우리 가운데 하나로 육화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천사의 방문을 받은 마리아가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괜찮다. 나를 겁내지 않고 살아도 된다.” 이 말은 우리를 안심하게 해줍니다. 두려움은 징벌을 생각할 때 나옵니다. 하느님 나라의 현장인 우리의 관계는 내어주는 사랑으로 하느님의 선하심이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선하심이 드러나는 곳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통제하려는 기도는 종교심을 믿음이라고 믿는 이들이 하는 기도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자만하는 자들이 만들어 낸 하느님입니다. 이들은 기도문을 셈하고 희생을 샘하면서 마치 하느님과 거래하듯이 기도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유를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누구도 하느님께서 자유롭게 하시는 일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업적과 공로가 아무리 크다 하여도 그분께서는 그것에 반응하시지 않으십니다. 기도가 거래의 수단처럼 되어가는 현상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경험할 때 두 가지의 현상을 경험합니다. 하나는 하느님의 이미지가 두렵고 떨리게 하는 무서운 하느님과 다른 하나는 매혹적이고, 황홀하고, 너무나 좋고, 놀랍고, 친근한 매력으로 끌어당기시는 하느님입니다.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만나게 되는 하느님은 한없이 멀고, 한없이 초월해 계시고, 너무나 거룩하셔서 겁먹고 뒤로 물러서게 하며, 힘이 너무나 강해서 그 앞에 서면 무력감만 느껴지는 하느님입니다. 이러한 하느님 앞에 서면 죄와 죄책감 때문에 전체에서 떨어져 나온 느낌이 자신을 사로잡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매혹적이고, 황홀하고, 너무나 좋고, 놀랍고, 친근한 매력으로 끌어당기시는 하느님에 대한 경험은 자비롭고 안전하고 따습고, 편한 아버지의 품을 관계에서 발견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두려움의 신비와 매혹적인 신비는 충돌합니다. 충돌을 경험한 이들이 가난을 통해 배우는 것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내어주는 사랑을 받아서 자신도 관계 안에 내어주기 시작합니다. 내어주는 사랑이 얼마나 기쁘고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자유가 그 무엇으로도 대치할 수 없는 행복감을 주는지를 경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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