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성모영면 (Dormition of the Holy Virgin)
제작 : 15세기
크기 : 목판 템페라 113X 88cm
소재지 : 러시아 모스코바 트레찌야코프 미술관
교회는 8월 15일을 성모 승천 대축일로 지내는데, 이 축일은 동방과 서방교회에서 다 기억되고 있으나 동방교회는 성모님의 영면의 모습을 서방교회는 성모님의 승천의 모습을 강조하는 전통이 있다. 이 성화는 동방교회 작품이기에 영면(永眠)의 모습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익숙한 뮤릴로(Murilo)를 위시해서 많은 작가들은 천사들의 옹위를 받으며 하늘로 승천하시는 성모님의 모습을 그렸다. 우리들은 예수 승천과 성모승천이 같은 단어로 쓰이고 있으나 실은 다른 것이다. 예수님의 승천(Ascention) 은 당신이 하느님이 시기에 죽음 후 부활의 시기를 지상에서 보내시다 하늘로 오르신 것을 표현한다면, 성모 승천은 당신이 피조물이시기에 하느님의 힘으로 하늘에 오르시는 것이기에 승천 (Assumption)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성모님의 영면이나 승천은 성서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 교회의 전승에 속하는 것이다. 전승에 의하면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성모님은 요한복음의 내용대로 사도 요한의 보살핌 속에 사시다가 영면하셨다. 이때 다른 제자들은 다 성모님의 임종을 지켰으나 사도 토마만은 선교지에 출타했다가 성모님의 임종을 지키기 못했기에 너무 안타까워 성모님의 무덤을 열어 보았더니, 성모님의 시신을 없고 향기로운 백합 송이가 있었다는 전승에서 유래되었다.
이것을 동방에서는 영면의 차원을 서방교회는 승천의 차원을 강조하면서 축일의 신심으로 정착되었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1950년 교황 비오 12세가 이것을 신앙교리로 선포함으로써 법제화했다. 제도적인 성격이 강한 우리 교회는 법적인 차원으로 다루는 경향이 다른 종교보다 더 강하다.
그런데 이것이 현대인에게는 어떤 때 신앙표현에 장애가 되기도 하는데 성모 승천 신앙교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현대인들은 법이면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사고방식 보다 합리성이나 자기에게 공감대를 줄 수 있는 차원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신앙교리로 되면서 성서를 유일한 신앙의 원천으로 여기는 개신교는 그만두고라도 우리 보다 훨씬 더 깊은 성모신심을 가진 동방교회와도 일치에 있어 어색한 관계가 되어 버렸다. 이것은 성모 공경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개신교도들에게 성모공경의 부정적인 차원을 더 강화시킨 계기가 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법으로 규정해야 직성이 풀리는 신학자들과는 달리 예술가들은 자기 가슴에서 우러나는 감성의 표현으로, 성서나 교회 전승이라는 틀이나 법으로 끼어 맞추는 것과는 다른 가슴으로 통할 수 있는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아름다움이라는 국제어로서 사람들에게 접근하는데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작품은 비쟌틴(Byzantine) 성화로 표현되었던 많은 작품 중 하나이면서 비록 성모공경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개신교 신자라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같은 본성적인 따뜻한 가슴을 가진 사람이면 받아들이기 부담 없는 표현이다.
사도 요한의 보살핌 속에 사시다가 이승을 하직한 성모님의 관 옆에 제자들이 둘러 서 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사도 요한에게 맡기시는 모습을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표현으로 전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 이어서 그 제자에게 ” 이분이 네 어머니이시다.“ 라고 말씀하셨다.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 26- 27)
누워 계신 성모님을 사도들이 둘러쌓고 있다. 성모님은 자기들의 스승이신 예수의 어머니요, 또한 스승의 유언으로 정착된 자신들의 어머니이기에 제자들은 더 없이 애통하는 마음으로 성모님의 머리와 발치를 지키고 있다.
머리맡을 지키는 제자들은 성모님이 삶으로 보여주신 크리스챤의 모범을 본받고자 하는 열정을 느끼고, 성모님의 발치를 지키는 제자들은 스승이신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사도단의 어머니 역할을 하셨던 성모님의 더 없는 모성의 기억 앞에 효성스런 자녀의 모습으로 몸을 굽히고 있다.
이 장면은 인류 역사에 있어 수많은 감동을 주어온 어머니와 아들의 모델 중에 가장 아름다운 모델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모자관계는 보통 육체라는 매개체를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다. 그래서 불교의 경전 중 하나인 “부모은중경”에서도 어머니 공경의 이유 중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받은 어머니의 사랑을 깨우치는 육체적 차원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성모님과 제자들의 관계는 이것을 초월해서 더 깊고 높은 차원으로 모자 관계를 승화시키고 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마르코 3:35) 복음은 언제나 혁명적인 가치를 전하고 있는데, 사도들과 성모님의 관계야 말로 이 세상 인류가 실현해야 할 최고의 모자 관계임을 이 장면은 표현하고 있다.
제자들이 둘러쌓고 있는 관의 중앙에 예수님이 서 계신다. 예수님의 두 손으로 흰 포대기에 싸인 아기를 안고 계시는데, 이 아기가 바로 성모님의 영혼이다. 여기에서 성모자의 아름다우면서도 깊은 관계성이 드러난다. 성모님은 육신으로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신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기에 성모님께 있어 예수님은 육신의 아들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인 하느님이시다. 성모님은 여느 인간과 같은 죽음을 통해 육신에서 해방되시면서 당신의 영혼을 육신의 아들 이였던 예수님께 맡기고 계신다.
아무리 성서적인 바탕을 유일한 신앙의 원천으로 강조하는 개신교 신자라도 예수님 육신의 어머니로서의 성모님, 성모님 영혼의 주인으로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의 존재성은 결코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작가는 이 표현으로 교회가 만든 신조로서 어색해진 성모님의 위상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모든 크리스챤들의 가슴에 어머니적인 감동으로 파고들게 인도하고 있다.
서방교회의 성모승천이 성모님이 천사의 옹위 속에 하늘로 오르는 것이 특징이라면 동방교회의 영면은 예수님이 어머니의 영혼을 안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하는 전통이 있다.
이 세상 순례의 여정을 끝낸 사도들은, 이승을 하직하신 성모님의 관 옆에 모였던 것과 같은 모습으로 하늘에 옹위해 있다. 사도들은 이 세상에서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십자가의 죽음을 겪으신 스승 예수의 뒤를 따라 순교자의 영광된 모습으로 하늘 보좌에 올라 성모님과 함께 있다.
지상에서 성모님의 관 곁에 있던 슬픈 모습이 아닌 인간적인 모든 번뇌에서 해방된 승리한 자유인의 모습이다. 사도들은 천상승리의 상징이듯 천사들의 옹위를 받고 있다.
이처럼 천사들의 옹위를 받는 사도들은 하늘에서도 성모님을 모시고 하느님을 찬송하는 모습이다. 여기에서 작가는 성모님과 크리스챤들의 관계를 실과 바늘의 관계처럼 분리될 수 없는 존재로 묶고 있다.
하느님을 찬송하는 예수의 제자로서의 크리스챤들에겐 성모님이 분리될 수 없는 존재로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것을 성서 구절을 통해서가 아니라 인간적인 정감을 통해 강조하고 있다.
개신교가 “오직 성서만으로”라는 주장의 일방적 강조가 신앙의 순수함 보다 어떤 때는 인간의 건전한 감성을 배제하는 것 같은 옹졸함으로 느껴지는 안타까움을 느낄 수 있는 현실에서, 이 작품을 바라보노라면 가톨릭과 동방교회가 성모승천이라는 교회 전승을 수용함으로서 인간의 감성에까지 감동을 주는 여유롭고 멋진 종교라는 자부심을 느끼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