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핍한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 손님 접대에 힘쓰십시오.
여러분을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십시오.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 주십시오.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
우리는 보통 스바니야서를 오늘 첫째 독서로 읽는데
작년에 이어 올해도 바오로 사도의 서간을 가지고
저는 오늘 축일의 의미를 새겨보고자 합니다.
왜냐면 바오로 사도의 서간이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라고 하는데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이 바로 이런 뜻에서 방문한 것이라는 생각으로
오늘 전례가 이 서간을 택한 것이라고 제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분명 그랬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임신을 축하하고,
엘리사벳의 기쁨을 함께하기 위해서 방문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른 생각도 해봅니다.
마리아 편에서 필요는 없었을까?
이 방문에 엘리사벳을 위해서만 방문한 것이 아니라
마리아 자신을 위한 것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오늘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가기 전에
마리아에게 있었던 일을 기록하는 복음을 보겠습니다.
마리아가 임신 사실을 통보받을 때
마리아는 놀랍고 두려웠으며 의문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래서 가서 본 것일 겁니다.
가서 보면 더 확신을 가질 수 있고 두려움도 줄어들거나 사라질 것입니다.
가서 하느님의 구원 업적을 눈으로 확인해보면 더더욱 그리될 것입니다.
확인에 의한 확신입니다.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고,
확인하지 않고도 확신할 수 있는 마리아라고 우리가 믿지만
마리아에게 우리와 같은 인간적인 면도 있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하느님께서 이루신 구원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던 면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는 시메온이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봤을 때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라고 하느님을 찬송하는데
이것이 목동들에게도 보라고 하는 루카 복음사가의 일관된 생각입니다.
구원을 보는 것은 믿는 이들에게 공통적입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믿지 않는 이들은 서로에게서 구원을 보지 못하는데
그 이유가 뭐냐 하면 구원을 보고 싶지도 않고 보려고 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축일을 지내며 이 두 분에게서 배울 점은
우리의 수많은 만남이 인간적인 위안이나 기쁨을 주고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구원을 보고파서 서로 만나고 그래서 마침내 서로에게서 구원을 보는 점입니다.
어쨌거나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구원을 보는 사람이고,
서로에게서 그리고 만남 안에서 구원을 보는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