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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적 동등성이 있는 곳에 공존과 평화가 있습니다.

by 이마르첼리노M posted Jun 12,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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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적 동등성이 있는 곳에 공존과 평화가 있습니다.

 

새로운 아침마다 무상의 선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화려하고 다양한 색깔로 날마다 새로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삶이 아름답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체계적인 이론을 동원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열어놓은 가슴과 눈으로 아름다운 사물들이 다가오도록 놓아주면 됩니다.

 

먼동이 트는 하늘과 잠에서 깬 새들과 아침이슬을 머금은 꽃들, 두 팔을 벌리고 나를 맞아주는 나무들의 몸짓, 계절마다 다른 옷을 갈아입는 피조물을 목격하면서 그들은 자기네가 서로 속해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내가 시간을 내어 충분히 바라보면 그들은 자신의 신비를 열어 보입니다. 우주를 돌보시는 아버지께서 피조물의 하나로 여기 머물게 해주시고 나도 그들과 함께 찬미가를 부르도록 내 몫의 악기를 찾아내어 창조주의 지휘에 따라 조화로운 교향악을 연주하게 하십니다.

 

내가 사라지면 참여의 의미가 없습니다. 매력적인 우주를 유산으로 물려받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내가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골로 1,16)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나는 생명을 주고받는 생명의 사슬에 연결되어 있기에 내어주는 몸으로 우리를 가르치신 하느님을 내어주는 몸으로 드러냅니다. 어디서나 듣고 볼 수 있는 생성과 소멸을 통해 자연이 우리를 가르치는 교사라는 사실을 배웁니다. 왜냐하면 자연은 아버지의 품이며 그 품에 안겨있는 어린아이처럼 안전과 풍요를 거기서 누리기 때문입니다.

 

다른 피조물과 비교하여 우월하다는 자아도취와 중독의 감옥에서 벗어나려면 다른 피조물과의 동등성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같은 기원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에 굴복하는 마음이 없으면 결국 나를 지배자와 통치자로 만듭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하실 일이지 우리가 할 일이 아닙니다. 성프란치스코의 작음의 영성은 피조물과의 동등성을 넘어 우리를 그 아래에 두도록 초대합니다. 피조물들은 저마다 본래 창조된 모습으로 창조주를 찬미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창조의 목적을 상실하고 지배의 영역을 넓히면서 통제가 목적이 되어버렸습니다.

 

과학 문명과 더불어 태어난 개인주의는 서로 연결되어 생명의 에너지를 주고받는 관계를 지배의 구조로 만들어 하느님처럼 행세하려고 합니다. 여기에서 인간의 비극이 시작되었고 탐욕과 지배라는 구조적 실재가 인류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상호 간에 내어주는 공존보다 독점과 소유를 확장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킵니다. 인류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지구 안에 전쟁이 멈춘 날은 하루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하여 더 많은 사람을 죽이는 악순환 속에서 불안과 공포와 절망의 신음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흥건하게 들립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동등성을 포기하고 인간의 동등성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낮추어 꼭대기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관계의 동등성을 회복하려면 너와 피조물과의 동등성에 기반을 두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형제적 동등성이 평화를 가져오게 합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형제적 동등성 위에 수도회를 세웠습니다. 관계의 기초가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위로부터 새로 태어나는 사람, 새 인간은 자기 창조주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된 지식을 가지게 됩니다.” (골로 3,10) 참된 지식은 우리와 동등해지기 위하여 하느님의 동등성을 포기하신 예수님처럼 온유하고 겸손하게 하느님과 너를 받아들일 공간을 마련하려는 내적 가난에서 깨닫게 되는 신비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앎이 참된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의 지체들은” (골로 2,19) 하느님의 자리를 넘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동등성이 가져오는 관계의 신비 안에서 무상의 선물을 받아 굴복하고 누리고 내어주면서 동등함을 넘어 발을 씻어주는 위치로 스스로 내려갑니다.

 

아침마다 눈을 제대로 뜨고 잠에서 깨어나는 사람은 실존 세계도 깨어납니다. 깨어나지 않은 가슴은 깨어난 실재를 인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침마다 무상의 선물을 바라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피조물과의 동등성 안에서 그들을 형제라고 불렀던 성 프란치스코처럼 우리도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며 그들과 함께 성대한 찬미가로 주님을 찬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생생하게 살아 있고 신선하며 사랑이 가득 찬 하느님께서 가까이서 나를 감싸고 계심을 느낍니다. 잠에서 깨어난 우리가 상호 간에 자신을 내어주는 창조물의 경이로움에 감탄하면서, 동등함을 지닌 형제로서 하느님의 선을 공유하는 거기에 기쁨이 발생합니다. 모두가 같은 바탕 위에, 어머니 땅 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묵시 21,1) 돌아갈 희망이 생겼습니다. 이는 당신의 거처를 사람들 가운데로 옮기신 육화의 신비를 통해 너와 나의 관계 안에서 자비와 선이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작음의 꽃이 피어 동등의 열매를 맺기까지 온유와 겸손을 배우는 사랑의 학교에서 너와 피조물이 공존하는 법을 배우는 수업을 시작합니다. 1교시 내려가는 길, 2교시 내려놓는 길, 3교시 허용하는 길, 4교시 놓아주는 길, 종합시험 관계 안에서 내어주는 몸과 쏟는 피의 현장실습

 

동등해져야 사랑하기 쉽습니다. 동등해져야 내어주고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동등해져야 용서하기 쉽습니다. 이것이 우리와 동등하게 된 하느님이 가르쳐주신 진리입니다.

 

공존과 평화의 열매는 거기서 열립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고”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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