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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놀이터 (우주 안에서 경탄하는 신비)

by 이마르첼리노M posted Jun 24,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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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놀이터 (우주 안에서 경탄하는 신비)

 

하느님의 신성(神性)과 인간 사이의 무한한 간격을 메우기 위한 하느님의 계획은 당신의 한 부분인 성령을 우리에게 내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새로운 계약이 뜻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경이로운 하느님의 계획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한계를 초월한 신비로써 우리 안에서 일하시고, 우리를 통하여 하느님에게로, 우리 이웃과 우리 원수들에게로, 우리 자신의 아프고 상처받은 관계로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이 흘러가게 하는 성령의 활동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활동은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설명이 가능한 신비는 신비라고 할 수 없습니다. 믿는 이들은 이 신비와 연결되어 무한한 생명의 에너지를 무상으로 거저 받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곧 진리의 성령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일 수 없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이 너희와 함께 사시며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요한 14,16-17)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요한 14,23)

 

이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주실 성령 곧 그 협조자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주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하여주실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라.” (요한 14,26-27)

 

인류 역사 안에서 바라보면 너무나 많은 이들이 인간으로 존재하는 법을 배우기도 전에 영적으로 존재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신성보다 인간의 모델로 오셨는지도 모릅니다. 먼저 필요한 건 하느님의 창조 안에서 내가 누구이고 어떤 존재인가를 알아가는 일입니다. 나의 안전과 생존의 욕구가 채워지지도 않았는데 측은한 마음으로 형제들을 돌보는 영적 수준에 도달하기는 어렵습니다.

 

자연 안에 숨 쉬는 생명들이 생명의 에너지를 주고받으며 존재하는 신비를 깊이 바라보면 하느님의 손길이 보입니다. 들판의 꽃이나 공중의 새들을 즐길 수 없으면 하느님을 즐기거나 다른 사람을 깊이 존중할 수 없으며 사랑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나도 그들의 하나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자연 안에 살아있는 존재들과 나는 동등한 관계이지 우월한 존재가 아닙니다. 나에게 형제적 동등성을 깨우쳐 주신 분은 성 프란치스코였습니다. 그분은 피조물의 찬가에서 태양과 달과 별, 불과 물, 바람과 공기와 갠 날씨까지 동등한 형제로 불렀습니다.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의 죽음까지 자매로 받아들였습니다.

 

피조물과 형제적 동등성이 회복되지 않으면 인간의 우월성은 피조물을 독점과 소유의 대상으로만 바라보고 이용의 가치만 따질 것입니다. 성령의 활동은 인간에게만 국한하거나 제한 할 수 없습니다. 온 우주는 하느님이 일하시는 일터이기 때문입니다. 창조를 인간 중심에 두고 우위에 두려는 이들이 창조를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이라고 해석함으로써 본래 목적을 잃어버렸습니다. 우주는 공존하고 공생하는 형제적 관계이지 독점과 지배적 구조가 아닙니다.

 

설명할 수 있는 신비는 신비가 아닙니다. 무엇인가를 바쳐서 얻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하느님과 거래한 것이지 하느님으로부터 무상으로 받은 선물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무상성과 보편성은 완전히 하느님의 자유에 속한 일입니다. 인간의 업적과 공로가 하느님의 자유로운 활동을 제한 하거나 움직일 수 없습니다. 여기에 인간이 만든 인과응보의 틀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유를 제한하고 자기편으로 만들려는 탐욕이 있습니다. 인과응보의 틀로 신비를 설명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활동은 설명할 수 없는 신비이며 언제나 신비로 남아 있습니다. 생명의 에너지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성령을 불고 싶은 대로 부는 바람처럼 느낍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변화의 흔적을 남깁니다. 인간은 이 변화 속에서 경탄할 뿐입니다. 경이롭게 감탄하는 신비 속에 하느님 나라의 현재가 있다고 느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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