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을 읽다가 문득 의문이 드는 것이 있었습니다.
명색이 율법 학자인데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을 무시한다니!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을 율법의 대가라는 사람들이
몰라서 무시한 것인가, 알고서도 무시한 것인가?!
어제부터 저희는 ‘프란치스칸 가족 수련자 모임’이라는 것을 하고 있는데
그제는 오늘 할 수련자 모임 프로그램 준비를 위해 답사를 다녀왔습니다.
그것은 산행을 하면서 하는 우주적 형제애 체험 프로그램인데
저희 수련 형제들이 그중의 하나로 게임을 준비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얘기를 들어보니 그 게임이 재미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의미를 살리면서도 프로그램을 재미있게 하는 거라면 좋지만
그저 재미를 위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제가 짚어줬습니다.
이런 경우는 생각이 짧아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이 짧아서가 아니라 교만해서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영어를 보면 ‘무지’란 뜻의 ignorance란 말이 있는데
제 생각에 이 말은 ‘무시하다’는 뜻의 ignore에서 나온 말인 것 같습니다.
교만하면 무지에 대해서 무지합니다.
바꿔 말하면 자기가 모르는 것에 대해서 모르는 것입니다.
뭣을 자기가 모른다고 생각하면 겸손하게 알려는 태도를 취할 것이고,
그래서 그것을 알게 되거나 적어도 모른다는 것을 알기에 겸손할 것입니다.
그러나 교만하면 자기는 다 안다고 생각하기에 알려고 들지 않고,
알려고 들지 않기에 모르면서도 여전히 자기는 다 안다고 교만하게 됩니다.
크게 깨지기 전까지는 이 교만과 무지의 악순환에는 정말 대책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불쌍하다고 하지 않고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교만에는 대책이 없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보다 더 중요한 것이 분명히 있는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 거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그래서 의로움, 자비, 신의가 십일조보다 중요하다는 것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못하니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주님, 제가 무지에 대한 이 교만한 무지에 빠지지 않도록 자비를 베푸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