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주님, 저희 하느님!”
토마스를 따라서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에 가기 위해서는 주님을 따라야 하지만
완전하고 확고한 믿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토마스를 따르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의심하거나 불신하신 적이 없으니
우리가 믿음으로의 여정을 주님을 따를 이유가 없지요.
반대로 토마스는 제일 의심이 많고 믿지 못하던 사람인데
이런 사람이 제일 완전하고 확고한 믿음에 도달했으니
토마스처럼 의심 많고 믿지 못하는 우리는 토마스가 우리 모델로 딱 맞지요.
그런데 우리는 토마스의 믿음 여정을 본받아야 하지만
의심과 불신도 토마스처럼 해야 할 것입니다.
의심과 불신도 제대로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라고 한 토마스처럼 딱 부러지게 불신해야 하는데
우리는 확고히 믿지 못하면서도 불신의 자기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기에,
그리고 의심에 의심을 거듭하지 않고 대충 의심하기에
의심을 끝장내지 못하고 여전히 의심에 머물곤 하지요.
우리는 나는 결코 믿지 못하겠다고 한 토마스처럼
자기의 불신에 솔직할 수 있고 의심에 철저할 수 있습니까?
오늘 복음을 보면 토마스는 제자들 공동체를 떠나있다가 8일 만에 나타납니다.
왜 떠나있었을까요? 어디 있었을까요?
진짜 절망했고 다른 어떤 제자들보다 절망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스승의 떨거지들과도 절연하고 완전히 혼자 있고 싶었을 것입니다.
절망해본 사람은 압니다.
절망의 절연입니다.
어쩌면 동굴에 숨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거기서 고독하게 자기와만 싸우지 않고
분명히 하느님과 마주하며 하느님과 싸웠을 것입니다.
그러지 않았으면 제자들 공동체로 돌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절망할 때 토마스처럼 자기 절망 안에만 갇히지 않고,
하느님과 마주하며 하느님과 싸웁니까?
어쨌거나 이런 과정의 여드레가 지난 다음 공동체에 돌아왔는데
다른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볼 때 부활 체험은 공동체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혹 혼자서 부활 체험했더라도 체험한 뒤에는 공동체와 나눕니다.
부활과 생명과 사랑과 기쁨은 어디에 갇히지도 않고
그것들을 내 안에 가두려 해도 그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주님께서는 동굴에 혼자 있는 토마스에게 나타나지 않으시고
공동체로 돌아온 토마스에게 나타나시고 이제 부활을 믿으라고 하시는데
부활을 믿으라고 하심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믿으라는 말입니다.
이때 토마스는 비로소 완전하고 확고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이분이 하느님이시고 자기의 주인님이시라는 것을 말입니다.
이제 의혹과 의심은 말끔히 가시고 주님만 따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토마스의 믿음 여정을 따르라고 주님의 초대를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